<박경애의 이 노래 : ‘곡예사의 첫사랑’>

by 성대진

가수에게 인기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인기라는 것이 없다면 나훈아나 조용필은 노래 잘하는 할아버지에 불과하고 마이클 잭슨은 춤과 노래 모두 잘하는 흑인에 불과합니다. 인기라는 것이 있어야 가수라는 연예인을 완성합니다. 인기가 없다면 평범인에 불과합니다. 인기 때문에 룰라를 떠난 김지현은 굴욕적으로 ‘김지현(룰라)’라는 표기를 했고, 제시카도 소녀시대를 떠났지만 ‘제시카(소녀시대)’라는 굴욕을 감내하는 표기를 사용합니다. 이런 표기는 옛날에도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김동자는 ‘김동자(김씨네)’, 권선국은 ‘권선국(녹색지대)’라는 표기를 했습니다. 그놈의 지명도, 그리고 인기가 뭐길래!



그러나 인생사와 마찬가지로 예외는 존재합니다. 송골매의 메인보컬이었던 구창모는 솔로로 독립하자마자 ‘방황’, ‘희나리’ 등의 잇따른 히트로 송골매 후광을 버렸습니다. 현철도 ‘현철과 벌떼들’이라는 호칭을 뗐으며, 김정수도 ‘김정수와 급행열차’라는 호칭을 버렸습니다. 박경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로 독립하자마자 취입한 ‘곡예사의 첫사랑’이 초대박을 쳤고, 죽는 순간까지 ‘산이슬’이라는 그의 데뷔 그룹명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정수라도 장재현과 듀엣으로 ‘아! 대한민국’이라는 초대박곡을 불렀지만, 장재현의 군복무 때문에 불가피하게 솔로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녹음까지 했습니다.



‘산이슬’의 대표곡 ‘이사가던 날’을 구성했던 맑은 목소리의 두 가수의 절묘한 화음 때문에, 박경애는 자신의 고유한 개성, 그리고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바로 이 노래, ‘곡예사의 첫사랑’ 때문에 대중에게 자신의 가치를 과시했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박경애 아니면 흉내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감정과 열정을 녹여낸 명곡이기에, 그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리메이크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정 ‘곡예사의 첫사랑’은 박경애만이 부를 수 있는 곡이 아닌가 합니다. 박경애가 온몸을 녹여내는 듯한 열정으로 부르던 것이 선한데, 박경애는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 자연스럽게 ‘산이슬’에 대한 기억, 그리고 듀엣 멤버인 주정이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물론 주정이도 솔로로 활동을 시도했지만, 히트곡이 없는 솔로가수는 그냥 옛날 ‘산이슬’의 멤버로만 대중의 기억에 남는 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QYTIMLRETs&list=RDZQYTIMLRETs&start_radio=1

‘곡예사의 첫사랑’은 명곡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흔적이 물씬 납니다. 일단 곡예사는 써커스단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 써커스 자체가 사라진 지가 오래입니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78년 당시에도 써커스단은 사실상 사멸했습니다. ‘곡마단’이라는 이름으로 시골에서 약장수로 연명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도시에서 써커스단이나 곡마단이나 모두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곡예사도 사실상 활동이 없던 시기인 셈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사 중에서 ‘맹서했었지’라는 대목도 표준말 다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는 문화재 때문에 ‘서’라는 발음이 표준이되, ‘盟誓의 독음’의 경우에만 맹세가 표준말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바뀌어 ‘맹서’와 ‘맹세’ 모두 표준말로 취급됩니다. 마치 자장면이 단독 표준말이었다가 ‘짜장면’까지 표준말이 된 것과 유사합니다.



아무튼 박경애, 하면 바로 이 ‘곡예사의 첫사랑’이 떠오를 정도로 그의 대표곡입니다. 당연히 ‘산이슬’, 그리고 ‘이사가던 날’은 열성팬이나 기억할 정도입니다. 가수가 그렇게나 인기에 목을 메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채연의 이 노래 : ‘흔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