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컨셉으로, 게다가 ‘주작방송’으로 낙인까지 찍힌, ‘나는 자연인이다’가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고정출연자가 뭔가 자유분방하게 생긴 인물이라 시청자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점 외에도 시청자의 근원적인 갈망을 해소시켜준다는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는 자연인의 삶을 동경하는 것에서 ‘나는 자연인이다’가 인기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미 2,500년 전에 석가모니가 해탈한 이치, 즉 인간사 자체가 고해라는 그 언명이 그 인기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단점이 곧 장점이고, 또 장점이 단점입니다. 속세에서 받는 고통이란 실은 희열이자 생존에너지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연인으로 그렇게나 오래 살았어도 고독의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삶을 살아가는 죄수에게 가장 큰 고통이 독방이라는 말은 인간의 속성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 말고도 고독이 주는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인과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삶이 또한 즐거움의 원천입니다. 전원주택에서 호젓하게 살던 사람들 중에서 고독의 즐거움을 말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없던 이 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대중가요는 대중예술입니다.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대중예술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그 해석은 대중이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습니다. 비록 창작자라도 그 해석을 속박할 수 없습니다. 김원중의 ‘바위섬’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배경인 민중음악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김원중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연시로만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결코 오답만은 아닙니다. 김원중의 ‘바위섬’의 가사를 사전적으로만 해석하면 외떨어진 바위섬에서의 서정을 노래한 것이 맞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klBuSHDUCw&list=RDQklBuSHDUCw&start_radio=1
아무도 없는 공허한 바위섬에서의 서정은 실은 누구나 동경하는 삶, 즉 자연인의 삶이기도 합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야만적인 살육도 사회라는 공간에서 펼쳐진 것이며, 그 야만이 활개치는 사회를 떠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공간도 역시 형태를 달리하는 사회입니다. 바위섬이라는 공간은 고난이 펼쳐지는 사회를 떠난 이상향 내지 유토피아로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유토피아는 천사와 선량한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며, 홀로 살아가는 공간은 아닙니다. 바위섬의 가사는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라고 읊조리지만, 그 이면에는 그리워하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 즉 피폐해지기 전에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고난을 겪지만, 그 고난의 극복도 사회라는 공간에서 해소를 합니다. 나아가 그 사회에서 즐거움과 안락을 얻습니다. 얼핏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모순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에서 상처를 받아 ‘바위섬’으로의 도피를 얻으려 하고, 또한 힐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이 돌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사회입니다. ‘바위섬’에서 작중 화자는 고독을 느끼지만, ‘바위섬’은 텅빈 공간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이웃이 어우러지는 사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