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시절 학창시절을 보낸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그냥 실리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이유가 있음을 국어 교사로부터 듣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수험생활에 찌들어 그 진면목을 알지 못하다가 세월이 흘러 교과서 속의 시를 음미하다 보면 그 절묘한 상징과 언어조탁이 유려한 시어의 선택에 탄복을 하게 됩니다.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국어의 미학과 언어생활을 이끄는 길라잡이가 맞다는 감탄을 곁들이게 됩니다. 괜히 한용운이니 김소월이니 하는 분들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아님을 자각합니다.
한용운, 김소월 외에 중고교 교과서에 단골손님격으로 꾸준히 실리는 시인들이 몇몇 있습니다. 김춘수, 김남조, 그리고 김현승 등이 대표격인 시인들입니다. 이 시인들은 당연히 교과서에 실릴 자격이 있는 품격이 높고 정제된 시어를 구사하는 분들입니다. 김춘수의 이지적이고 중후한 시어, 김남조의 세련되고 소통공간이 열리는 시어, 그리고 김현승의 구도자적 시어 모두 격조있는 시어의 전범입니다. 그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했던 시는 김현승의 ‘플라타너스’입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실렸고, 고교 문학 교과서에서도 실렸으며, 심지어 집안에 굴러다니는 한국시선집에도 실렸습니다. 실은 7080시대에는 유명 시인들의 시집이 집집마다 한 두권은 책꽂이에 꽂히는 것이 보통인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김현승의 시가 대중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시가 문학적 가치를 대중으로부터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플라타너스는 처음 접할 때부터 뭔가 가득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길거리에 흔한 가로수인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담는 시를 짓는 것이 경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연은 아직까지 애송하는 하이라이트입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까지 이웃이 되고프다는 시어가 팍 꽂혔습니다. 말 없는 플라타너스는 실은 시인 자신입니다. 김현승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고독한 자아의 모습이 바로 플라타너스입니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 모습이 고독한 시인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지만, 유독 ‘시’ 플라타너스와 ‘현실’ 플라타너스는 괴리가 심했습니다. 가로수로 쓰이는 현실의 플라타너스는 그 특유의 고약한 냄새에 짜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버즘나무로 불릴 정도로 나무껍질의 기괴한 모습도 그리 반갑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수 지자체에서 가로수 교체작업으로 플라타너스가 희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승의 ‘플라타너스’는 아직도 시를 좋아했던 학창시절의 아련한 감상과 추억을 반추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