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신다, 어서 장난감 치워야지."
나의 아내가 어린 딸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내가 퇴근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분주해진다.
아빠 오시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제자리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교육정책이었다.
어릴 적 딸들은 아빠가 좀 어렵고 무서웠다고 했다.
어쩌면 딸과 아빠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아내의 이간계(?) 덕분인지 모른다.
딸들이 커가면서 아빠의 역할 모습도 변해져 갔다.
세발자전거에 줄 매어 앞에서 끌어 동네 한 바퀴 돌기,
공기놀이 잘하는 법 흥분해가며 가르쳐 주기,
보조바퀴 떼어내고 두 발 자전거 혼자 타는 법 가르쳐 주기,
주말이면 엄마가 안 사주는 불량식품 같이 사 먹기 등.
그렇게 지내다 보니 딸들은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여고생이 되었다.
갑자기 아빠가 딸들에게 가르쳐 줄게 사라졌다.
그리고 딸들이 커갈수록 아빠가 딸과 함께할 일도 차차 없어져 갔다.
자연스레 딸들에게 필요한 건 모두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나는 고민 끝에 새 작전을 세웠다.
매일 아침 등교 길에 딸들을 차에 태워 교문 앞에 내려 주기이다.
10분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차 안의 어색함을 깨려다 보니 잡다한 얘기라도 몇 마디는 해야 했다.
매일 그렇게 딸과 조잘거리다 보면 학교가 너무 일찍 눈앞에 나타나버린다.
그래도 난 차 안에서 하는 딸들과의 대화를 계속하였다.
여고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취준생이 되면서
다행히도 아빠는 딸들과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회사원이 되고, 출근 길도 길어졌다.
덕분에 이야기할 시간도 길어졌다.
어느덧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알려주던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딸과 아빠는 이제 친구가 되어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
늘 이야기의 주제는 딸이 꺼내고 아빠는 응답한다.
이제 아빠가 해줄 게 없어 보인다.
오히려 딸이 아빠를 걱정하고 아빠에게 요즘 세상을 가르치려 한다.
이제야, 나는
왜 한 세대를 30년으로 말하는지 알 것 같다.
딸의 나이가 30에 가까워지고 직장인이 되고 나니, 세상의 주역이 바뀜을 실감하게 된다.
세대가 교체되는 것이다. 책이 아닌 현실로 그것을 본다.
'한 세대'라는 게 '사회의 중심으로 역할을 하는 기간이 30년임'을 말하고 있나 보다.
30년을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다.
반면, 딸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씩 사회의 일원으로 착착 자리를 잡아간다.
우리의 빈자리를 딸의 세대가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상을 움직이고 회자되는 키워드들은 모두 딸들 세대의 이야기들이다.
지금 그들의 세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딸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태어나서 철이 든 지금까지의 시간을 헤아리면 30년이다.
어릴 때 찡얼거리다,
학교 다니고,
이제 취직하고 나니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네가 너의 그 시간, 30년을 뒤돌아 보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네게 주어진 한 세대도 같은 길이의 30년이다. 결코 길다고만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너의 인생을 대표하는 시간, 너의 세대인 앞으로의 30년은 그처럼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다.
그 길고 짧음은 결국 너 자신의 평가로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너의 인생이라 정의될 너의 세대’를 잘 계획하고 잘 요리해 가길 바란다.
너의 세대가 시작된 이제부터는 온전히 너의 주도로 너의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한다.
아빠는 이제 네가 원할 때 너의 고민을 들어주고 몇 마디 건네줄 그런 자리로 네 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자연스럽게 작아져 갈 것이다.
너의 지난 시절이 돌이켜 보면 별게 아닌 것으로 느껴지듯이, 앞으로의 그만큼의 세월 또한 지나고 나면 그럴 것이다.
아빠는 우리 딸이
세상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않으며,
자기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가장 편한 보폭으로
자신의 세대를 차분하게 걸어가면 좋겠다.
나는 우리 딸과 그 세대의 멋진 시대를 응원한다.
청춘들의 새로운 시대, 새 세대를 응원한다.
나의 바통을 받아 들고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딸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지나가고 있는 나의 세대를 추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