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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빈대디 May 31. 2022

안개를 만나면 천천히 걸어봐

터닝포인트를 만나면



며칠 전 딸과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오랜만에 딸의 고민을 들었다.


이제껏 치열하지만 현명함을 잃지 않고 직장생활을 해왔던 딸이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 듯 보였다. 또 다른 내일을 앞에 두고 다시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인 것 같았다. 자신이 설정했던 중간 목적지에 잘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제 자리도 잡았으니,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명제일 것이다.



"아빠, 요즘 들어 제가 가야 할 길이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며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래, 이제 네가 그럴만한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런데, 아빠는 요즘에 천천히 걷기에 심취해 있어."


"무슨 말이에요? 아빠."


"평상시보다 천천히 걷는 거지..."

하면서 나의 천천히 걷기 경험을 늘어놓았다.



천천히 걸으니, 목에서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거쳐 종아리까지 온몸의 근육들이 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오르막, 내리막, 평지를 걸을 때면 각기 그 상황에 따라 몸의 근육들이 다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같은 길도 아침나절과 점심나절, 걸을 때에 따라 전해오는 느낌이 다르다.


이렇게 천천히 걷는 것 하나로, 몰랐던 자신의 속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게 들려다 보고 있으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길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긴 사설을 끝내며 딸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천천히 걷는 걸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


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가 천천히를 말하니까 좀 이상하긴 한데,

또 이상하게 아빠랑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면 입천장을 자주 덴다. 심지어는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에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러니 딸의 그런 반응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요즘 ‘천천히’에 꽂혔어."

라는 농담과 함께 딸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봐."

"그렇게 걷다 보면, 네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나침반을 만날 수도 있어."



한참 생각하던 딸이 말했다.

"예, 한번 걸어볼게요."

"천천히요."



지금까지 '천천히'는 내게 약한 구석이었다. 실행하기 어려웠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 덕일까? 요즘 들어서는 그 '천천히'가 곧잘 된다.



천천히 걷기를 시작하면, 생각을 천천히 넓게 펼쳐놓고 살펴볼 수 있고, 찾던 길을 만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수도 있게 된다.


천천히 걸어보자.

내 속에 있던 나침반이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찾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딸이 천천히를 통해 찾고 있는 길과 마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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