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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Aug 30. 2020

"배움의 발견" 나의 과거와 흡사했다.

죄를 짓기 시작하다.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지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일날 금기시하는 항목들에 대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겠다.


*주일(主日) 날: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일요일을 주일(主日) 날로 명칭 한다. 주일날의 주(主)는 예수님이나 하나님 같은 신을 명칭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들이 그 날을 부여한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주일날은 TV도 라디오도 시청하지 않는다.

-상거래를 하지 않는다.(돈을 주고 거래를 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학교나 학원을 가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

-회사에 나가거나 혹은 출장도 가지 않는다.


 나는 누구나 처럼 태워 나면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경외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는 요즘 사회에서 떠들썩하는 신천지(교주:이만희) 같은 이단 종교는 아니었지만 보수적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인가 3학년인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일날 집에 이모가 찾아왔다. 주일날 예배가 끝나고 집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나를 본 이모는 조카에게 먹을 것을 사주려고 집 앞에 있는 슈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어려서부터 주일날 먹을 것을 사 먹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교회 선생님들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주일날 먹을 것을 사 먹는 것이 죄라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사 먹는 것이 아니라 이모가 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죄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아니, 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당시 몇 십원 밖에 하지 않았던 과자 조차 평소에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의 유혹에 쉽게 빠지고 말았다.  


19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지금의 시대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이 살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당시에도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상대적으로 더 가난했다. 초등학교 1~3학년 때까지는 가난의 의미와 가난으로 인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몰랐지만 머리가 커진 초등학교 4학년쯤이 돼서야 가난이 뭔지 알았고 가난이 남한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기준은 간단했다. 4 가족이 단 칸 방에 살고 있었고 점심 도시락에는 언제나 김치나 멸치뿐이었고 집에 비디오가 없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한 가난의 기준이었다.


 과자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나는 조카에게 선의를 베풀려고 하는 이모의 행동이 뱀의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없었고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의도적으로 거부하기 싫었다.


슈퍼 마켓에 들어간 나는 선반에 진열된 다양한 과자들을 보면서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자유에 너무나 신이 났다.


그러나 항상 인생은 단 맛 뒤 쓴 맛도 오게 마련이다.  이모가 사준 과자를 마당에서 먹고 있었는데 예배가 끝나고 돌아온 아버지는 천진난만하게 과자를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죄인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마당의 수돗가에 데리고 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빨래방망이를 집어 들더니 가냘픈 종아리를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빨래방망이의 생김새를 알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빨래방망이로 맞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도 짐작이 갈 것이다. 세탁기 흔하지 않았던 시절 빨래를 두드리면서 물기를 먹으면서 단단하고 거칠게  단련된 표면을 가진 빨래방망이는 가장 잔혹한  회초리였다.


 울며 불며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죄를 지었다는 분노심에 자신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잘못을 알면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을 수 없었으며 죄의 심판자가 되어 버린 아버지는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려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이 하와에게 느꼈었던 분노를 아버지 자신도 느끼려고 노력했고 그 대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거 같다.


 나는 올해로 40 중반이 되었지만 그 날 마당에서 나를 마구 때렸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모습이 제삼자가 주위에서 아버지에게 맞는 아이를 바라보는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너무 아파서 내 혼이 나가서 그 장면을 바라봤던 것이었을까?  


 이모는 단지 조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선을 베풀었던 것 것뿐인데 내가 맞는 모습을 본 이모는 얼마나 어린 조카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이모에게 뭐라고 쓴 말은 못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죄 없는 깨끗한 아이에게 처음으로 세상의 죄를 가르쳤다고 생각하며 이모를 미워하고 원망스러워했을까?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나에게 친구가 될 수 없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징계가 무서워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유혹했던 주변의 친구들을 죄인 취급하며 나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가는 거룩하고 정결한 존재로써 나와 세상을 구별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노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었고 한 번 죄의 달콤함을 맛보게 되면 그 맛에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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