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행성 1호

백김치와 아무개

텃밭에서 배추를 수확했다!

by 이봄
1.jpg 텃밭에서 배추를 뽑았다, 그렇다! 김장철이 다가온 것이다!

백김치와 아무개


텃밭 식구들과 남은 배추를 뽑았다. 지난주엔 무를 뽑아, 피클을 담고 무청은 푹푹 삶아 시래기로 만들어 얼려두었다. 실은 어딘가에 널어두고 오래오래 말려먹고 싶었으나. 어디 베란다라든지, 복도라든지, 적당히 그늘지고 바람 드는 공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라서. 무엇이든 작고 간편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했다.


이번 주엔 배추를 뽑아, 일곱 포기나 들고 왔다. 안다. 욕심이다. 엄청. 김장하겠다는 다른 언니들에게 더 보태어 보냈어야 함이 맞다! 내 욕심에 일단 들고는 왔으니, 무엇이든 해보기로 한다.


2.jpg 자, 단칼에 쓰윽!


우리 집은 매년 김장을 했다. 이모나 숙모는 “언니가 해야, 형님이 해야 맛있어요.” 라며, 연장자인 엄마를 앞세웠다. 그렇게 네 집 식구들이 한 번에 김장을 하느라고, 적게는 백 포기 많게는 이백 포기씩, 매년. 정말 매년이었다. 나도 그간 어깨 넘어 아름아름 배워온 것이 있으니, 그 경험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래 까짓, 한 번 해보자고.


올해 고춧가루는 금값이라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만날 때마다, 올해 고춧가루가 얼마나 비쌌는지 앞다투어 이야기했다. 만날 때마다 들어서 그런지, 내가 따로 사기에는 뭐랄까, 알아보기도 전에- 일단, 엄두가 나질 않았다. 새우젓도 싫어하니 그것도 빼자.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고춧가루 뺀 하얀 김치, 백김치를 해보자며 무릎을 타-악 친다! 그래! 이거야!


어제 유튜브와 여러 포털을 검색해 그나마 따라 해 볼 법 한 레시피를 적어두고, 장을 보러 나갔다. 생협에 미리 김장 생활재를 예약해두지 못한 탓에, 갓 같은 것은 구매할 수 없었다. 대신, 대추나 쪽파, 멸치액젓 같은 생활재만 구매하고, 나머지는 동네 여러 마트들 (통틀어 세 군데나)을 돌아다니며 저렴하되 싱싱한 것으로 골랐다.


3.jpg 이렇게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전날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고 잤다면 좋았을 걸, 아침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 배추부터 손질했다. 다섯 포기만 해보자, 얕잡아보기를 반복하고, 생각보다 크고 많은 양에 한껏 놀랐다. 다섯 포기나 절여 담아 둘 커다란 대야(?) 같은 것은 없으니- 싱크대를 엄청 열심히 닦아 그곳에 풀-썩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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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는 지난주에 수확해 온 작은 것 두 개가 있고, 쪽파나 갓, 대추, 밤, 마늘, 생강, 고추 같은 것들을 다듬는다. 영상에선 이 모든 것을 채 썰라 하여, 당연히 그리 하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닌 거다. 무 반통 썰다 결국엔 다시 나가, 채칼을 사 왔다. 나란 쪼렙은 이런 실수를 여러 번 반복했다.


6.jpg 이걸 언제 다 썰어?


물기를 빼고 속재료를 버무리고, 찹쌀풀을 쑤고 배와 양파를 갈아 단물을 짜고, 채소 거리를 넣고 우려낸 육수를 식히고 섞어 국물을 만들고- 다시 배추에 속재료를 넣어 버무리고 - 암만 봐도 통이 모자랄 것 같아 다시 나가, 통을 사 오고 - 배추를 통에 담아, 그래도 또 모자라서 집에 있는 작은 그릇들을 꺼내 넣고, 국물을 부어 끝이 났다.


7.jpg 뭐 이런 속재료



다 하고 나니, 깨닫는 여러 순진함들이 있다.


1. 대체 이 모든 속재료를 왜 채 썰었을까. 마늘이나 생강은 다진 게 있잖아??


2. 배와 양파를 갈아서 베주머니에 넣고 쥐어짜 단물을 받아냈다. 몹시 힘들었다. 다음부턴 그냥 생협 배즙을 넣을 것이다. 네 포 정도 사면 되지 않을까. 하


3. 굳이 채소를 끓인 육수를 냈어야 했나. 글쎄


4. 손맛, 정성 맛? 응? 뭐라고? - 생각해보니 매년 엄마가 하는 김장김치의 맛이 일관적이라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특히나 가장 어려운 것은, 배추와 속재료의 양이 딱- 비율이 맞아야 함인데, 이것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레시피는 아직 못 본 듯하니, 이건 그저 센스의 차원일까?


5. 그동안의 나는, 그저 거들먹거리며 거드는 일만 했다. 아니, 거드는 척 시늉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살림’ 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무릇 이것은 살리는 일, 그래서 살림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허나, 그간의 살림이란 일은- 대체로 무용하게 여겨져 왔다.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임에도, 누군가만 해왔을 뿐이며, 아무나 할 수 없음에도, 아무개로 여겨져 왔다. 수많은 아무개들 중 제 값을 받은 이가 있었을까? 내 주방에서 오늘을 책임지는 일들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때때로 ‘돈 안 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는 자괴감이나 허탈함이 들곤 했다.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내 생활을 무용하게 여긴 것이다. 나는 손쉽게 아무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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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버무리다, 겸조가 혼자 중얼거린다.

“넌 참 용감한 것 같아.” “김치라니!”

그러다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막 이런 걸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라는 질문에 나는 단 한마디로 일갈했다.


“이건 허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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