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쿄주로와 탄지로에 대하여

1. 시간의 유한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과 불사의 완벽한 존재의 차이 2

by 박규영

개인적으로 귀멸의 칼날은 다른 인기있는 애니메이션에 비해 유치하다. 적어도 내가 봤던 다른 작품-강철의 연금술사, 진격의 거인, 하이큐-은 때때로 일본 특유의 개그(?)와 유치함이 묻어져나올지라도 고민해볼만한 딜레마와 실제사회에 적용될 통찰을 주기 때문에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물론 귀멸의 칼날 1기에서 오니가 된 여동생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야 할 사명을 가진 탄지로의 서사는 표면적으로 꽤나 감동적이다. 그 과정에서 대면하는 동료들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오니들을 물리치면서 인간으로서 한층 성숙해가는 주인공 탄지로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캐릭터들의 외형과 전형적이고 너무 긴 탄지로의 독백에 기인하는 듯 하다.


시간이 남을 때, 겨우 1기를 다보긴 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후속작을 볼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추석 연휴였던가 언젠가, 티비에 무한열차편을 방영해 우연히 보게 되었다. 유치함이란 내재된 선입견 속에서도 인상깊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고 이는 두 정의의 사도 쿄주로와 탄지로의 이야기다.


(1)쿄주로는 ‘주’라는 직책으로 귀살대에서 비중있는 인물이다. 작중에서 그는 아카자라는 꽤 강한 오니를 상대하게 되는데, 잘은 모르지만 아카자는 맹목적인 살육과 인간을 증오하는 일반적인 오니와는 다르다. 쿄주로와 대결하는 내내 자신의 강인함의 원동력은 불생불사에 있고, 오니가 되면 불로의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아카자에게 살육과 싸움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인함을 확인하는 일종의 자아실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호각을 두는 상대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자신과 동일한 불로의 상태를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대결 내내 호각을 두지만 불사의 몸을 가진 아카자는 점차 회복하고, 쿄주로는 지쳐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쿄주로는 아카자의 유혹을 뿌리치는데, “나는 내 책무를 다하겠다”는 오글거리지만 그 밖의 표현이 불가능해보이는 명대사를 남기고 결국 패배하게 된다.


표면적으론 패배했지만 쿄주로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처럼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 설령 불생불사의 모을 가진다해도 말이다. 위 대사가 상징적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맞대결이 사실은 시간적 무한함과 유한함의 대결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쿄주로는 시간의 유한함 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언젠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그 사명을 지키고 사라진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과정 속에서 희노애락을, 성공적 혹은 불완전한 결과를 보며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실현이 고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탄지로의 논리가 허구인 이유. 결국 제 사명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는 쿄주로와 도망가는 아카자를 보며 탄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렌고쿠는 끝까지 우리를 지켰어. 렌고쿠는 지지 않았어. 우리는 너희에게 유리한 환경 속에서만 싸웠고, 너희는 우리가 유리한 환경에선 항상 도망쳤어. 비겁하게 싸우지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오니를 향한 탄지로의 논리는 정의롭지만 허구에 불과하다. 오니를 잡는 것은 룰을 지키고 싸우는 대련이 아니라 더 좋은 삶을 위한 싸움이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선 때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 현실세계에서의 모든 혁명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누군가는 피와 땀을 흘려야 할 순간이 있다.


어쩌면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여야 할 대상인 오니에게 조차도 동정을 느끼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탄지로의 성격 탓에 여태 유치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앞으로 더 냉철한 현실을 마주해야 할 우리의 주인공 탄지로가 어떤식으로 성장해나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공포의 대상이었던 작품이 논조의 대상으로 옮겨지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