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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쫌생일기

실적이 인격이라고요?

by 던컨

부진한 실적을 보고하는 일만큼 눈치 보이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회사는 매일매일의 실적을 계획 그리고 전월과

비교해가면서 진도와 추이를 살펴보게 한다.

대개 이런 일일 실적 보고는 부서 내 막내 직원이

출근하자마자 작성하여 메일로 관계자들에게

공유하게 마련인데 그것도 시절 좋을 때 얘기라서 우리같이 백척간두에 놓인 조직에선 담당하는

업무에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당연히 고참 일, 막내 일 구분이 없기에 얼마 전부터 나는 막내 직원이 해왔던 일일 실적보고를 임원과 관계자들에게 공유하고 있다.


원래 담당하던 막내 직원은 비전 없는 업무와 함께 내 위의 상사와 갈등이 있어 나도 어떻게

조치해줄 수 없는 직장생활에 힘들어할 때쯤

영리하게도 자신이 갈 만한 부서를 찾아 셀프 인사발령을 내고는 한 달만에 선배들에게

자기가 하던 일을 찢어주고서는 떠났다.


막내 직원이 일일 실적보고를 작성해서 공유할 때까지만 해도 내 담당 조직의 실적이니

내가 책임자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실제로

일일 실적표를 작성하게 되니 그 숫자가 주는 중압감이 이전과는 말도 못 하게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엑셀 칸칸에다가 실적을 기입하면 그게 그래프와 표로 생성이 된 다음 초과 달성이면 파란색, 미달이면 빨간색으로 기표되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파란색에는 기쁘고

빨간색에는 우울한 일희일비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실적이 계속 파란색이면 아침에 출근해서 일일보고를 작성하고 메일로 공유하는 데까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작성부터 공유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일도 계획비 미달이 나오면 이 실적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그 머릿속 생각은 어제 퇴근할 때쯤부터 시작된 걱정거리 중에 하나였다.

아침에 왔을 때 혹시나 했던 실적이 역시나 임을 확인한 순간 오늘 실적보고를 어떻게 할까?

하지 말까? 하는 비겁하고 쫌생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그 핑계를 삼아 오늘 일일 실적보고는 건너뛰자라고 마음먹기도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하루 이틀이라서 사흘 이상 빨간색 미달 실적이면 상황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이깟 실적이 도대체 뭐라고 이러는 건지"

"애초부터 잘못된 계획이었어"

"전월에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잖아"


하지만 모두 나에게만 합리화되는 얘기일 뿐

그 실적을 받아보는 상사 그 누구도

티끌만 한 사려 없는 대책 조급증 환자들 뿐이다.


"이 실적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아니 그걸로 그게 되겠냐고?"

"언제부터 개선으로 돌아서는 거죠?"


나라고 빨간색이 좋아서 늘 빨간색 실적을 갖다 주는 게 아닌데 언제부터 파래지냐고

닦달이 잦아들 때쯤 연말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1~2주일 내에 조직개편이 나고 부서장이 갈리게 되는데 그 시기만큼은 이런 닦달도 무의미함을

서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 지내고 돌아오니 오랜만에 파란색 실적을 받아 들었는데 세상 무의미한 시간에 개선된

실적이라 어디다 말도 못 하고 이렇게 브런치에서

홀가분한 마음을 글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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