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른 부서에 있는 직장 동료와
오랜만에 점심을 했다.
모밀 · 우동 전문점이었는데 일주일 전만 해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모밀을 먹었을 텐데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에 고민할 것도 없이 따끈한 냄비 우동을 골랐다.
동료는 열흘 정도 휴가를 다녀왔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시댁에서 먹고 자고 또 먹고 놀며 정말로 푹 쉬다 왔다며
근황 토크를 시작했다.
정말 좋았겠다며 맞장구치면서 그런데 휴가 기간 회사 메신저는 어떻게 했냐고 내 일 같이 걱정이 돼서 물어보았더니 쿨하게 로그아웃 해놨다고
했지만 걱정이 돼서 이틀에 한 번씩은 별일 없는지 로그인해서 열어보고 또 별일 없음에 안도하며
다시 로그아웃 하는 행동을 반복했다고 한다.
정말로 소심한 70년대생 평사원의 휴가 모습이구나 싶었다.
나 역시 그렇다.
휴가라고 해도 내가 멤버로 속한 메신저 방은 내 일정과 무관하게 아침부터 울려댄다.
안 읽은 메시지가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쌓여갈 때마다 휴가인데 저걸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글부글 혼자 끓이다가 혹시나 내가 대답할 내용은 아닌가 싶어서 소심 초조함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서 읽지 않은 메시지를 거슬러 올라가며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려 애쓴다.
"아빠 회사일 때문에 잠깐만" 하고 웅크리고 휴대폰을 보는 내 모습은
뮤지컬 공연 인터미션에서도,
부산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샤브샤브 무한리필 레스토랑에서도
어디서든 종종 목격이 된다.
그런 나는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고 승진해야겠다는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상명하복 노예근성을 문신처럼 새긴 지 이십여 년
내가 없는 사이에 대감님댁에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게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마음 절반
'아니! 너는 아무리 휴가래도 메시지는 봐야하는거 아냐?' 하는 책망이 두려운 마음 절반이 합쳐져서
그러는 것일 테다.
언젠가 아들이 내게 묻더라
다른 애들 아빠는 상무, 이사, 팀장인데 아빠는 회사에서 뭐냐고
"아빠는 그냥 프로야"
라고 대답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턱이 없는 초등학생 아들이다.
아무 직책 없는 프로이니 휴가 때만은 노예문신 벗겨내어 메신저로 안절부절 말고 그저 편히 쉬고 싶을 뿐이다.
feat. 서울시청 옆 무교동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