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외출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밤

by 혜준

한 지인이 프로젝터를 구입했다며 다양한 성능과 편리성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다. 귀가 솔깃했다. 누군가가 불러 주지 않으면, 계획해 주지 않으면 바윗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꾸물꾸물이지만 자진해서 하는 행동이 있다면 영화관 외출이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프로젝터로 벽면 가득 채워진 화면을 소파에 편하게 앉아 감상하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하지만 과연 난 영화관 스크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의 밤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막 초등학교 들어갔을 무렵인 것 같다. 내 일과 아이들 일로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때도 난 아이들이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피곤한 몸으로 영화관에 갔다. 집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위치가 신의 한 수였다. 9시 조금 넘어서부터 시작해 12시 정도에 끝나는 심야 영화를 작품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가서 보고 나면 뭔가 정화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도 감상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잠귀가 밝은 남편은 내가 아무리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들어와도 잠이 깨어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 시간에 일찍 자면 덜 피곤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나간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난 어김없이 마음이 시키면 순순히 티켓을 사서 컴컴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갔다.



영화관에는 크고 작은 밤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어떤 날은 아이들의 친구 아빠와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자기 아내에게는 쉬잇... 하고 내게 입단속을 했던 그 아빠의 절절한 심정을 내 멋대로 해석해 난 아직도 그 엄마에게 이 비밀을 감추고 있다. 그 아빠는 아직도 혼자만의 밤외출을 하고 있을까?

어떤 날은 객석에 달랑 나 혼자만 있을 때도 있다. 재벌도 부럽지 않은 전용 영화관이다. 귀신이 너무 무서운 나이지만 영화관에서는 왠지 귀신이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려 해도 허락할 것 같은 마음의 부자가 된다.

한 번은 혼자서 보고 있는데 흔들흔들 제법 큰 지진이 와서 엄청 놀란 적도 있다. 그때 난 내가 천재지변이 와도 신속하게 대피해 목숨을 보존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버티고 있었다. 스크린도 자기 할 일을 하며 꿋꿋이 내 옆에 버텨 주었다.



아이들이 성장해 이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고 오히려 엄마가 집에 없는 걸 신나라 하는 사춘기가 되고 나니 난 혼자만의 공간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타의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 놓여졌다고 해야 하나. 조금 분하기도 하지만 암튼 여전히 나는 혼자만의 시간에는 카페도 공원도 도서관도 아닌 영화관에 간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마음과 발길이 영화관으로 향한다.



지인이 가르쳐 주신 고성능 프로젝터를 언젠가 구입한다고 해도 나는 내 고단한 시절 조용히 날 불러 곁에서 말없이 토닥여주던 친구 같고, 애인 같고, 남편보다 더 남편 같았던 영화관을 배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추억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