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체국에 가야지!라고 다짐한 게 벌써 석 달째다. 작년 10월에 사다 놓고 아직도 엄마에게 부치지 못한 달력이 내 책상 위에서 얌전히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다. 1월이 지나 이제 2월이 오려고 하는데 이러고 있으니 엄마가 속 터질 만도 하다. 거의 매년 이런 식이다.
핑계를 대자면 달력만 달랑 보내기는 그렇고 달력과 함께 뭔가 엄마가 좋아할 만한 걸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내 행동을 느려지게 한다. 대충 넣고 싶지 않다.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셀렉트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비싸거나 고급스러운 것들이 아니다. 오밀조밀 초등학생이나 좋아할 것 같은 수첩이나 편지지 세트 같은 문구류, 키홀더, 손수건, 손거울, 에코백 같은 것들이다. 동네 큰 서점이나 쇼핑몰에서 그럭저럭 고르려다가도 엄마가 여기에 와서 물건 살 때 보이는 그 예리한 시선이 떠올라 주춤하게 된다. 엄마는 가끔 이곳에 와서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면 꼭 똥꼬(?)를 들여다본다. 아무리 예쁘고 마음에 들어도 "일본제(Made in Japan)"가 아니면 아쉬워 입을 쩝쩝 다시면서도 절대 사지 않는다(본인이 독일제(Made in Germany)라서 그런가?--여기에 대해서는 "용기 없는 엄마"를 참고). 그냥 사.... 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금액보다도 발품을 팔아야 모아지는 물건들이라 학기 중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있으면 죄책감에 엄마에게 안부전화도 하기 어려워진다. 세 번 전화할 게 한 번이 되고 이윽고 1월 중순이 되어가는 시점에 난 잠수를 탄다. 엄마를 매일매일 생각하면서도 전화를 할 수 없는 이 모순. 엄마는 안부전화 없는 딸이 괘씸해지기 시작한다. 미안함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엄마는 기다리다 못해 당신이 먼저 전화해 혼자 사는 노인네 걱정도 안 되냐고 하신다. 그게 아니라..... 어릴 적에도 그랬다. 엄마한테 혼난 다음 반성의 증표로 훌쩍거리고 있으면 뭘 잘했다고 우냐고 더 혼나곤 했다. 미안함이 커질수록 입은 더 무겁게 닫힌다. 내 마음의 진심이 너무 커서 말 한마디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때 나는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그때도 꼭 다물었던 입은 지금도 꼭 다물어진 채다.
남편은 빨간 날도 다른 외국 달력이 오히려 불편하지 않냐고 하지만, 어쩌면 엄마에게 있어서 이 일본제 달력은 그냥 달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의 자연 풍경이 종이가 아니라 얇은 비닐 같은 필름에 인쇄되어 날짜가 적혀 있는 달력 위에 살짝 얹어져 있는 느낌의 특이한 달력이긴 하지만 이유는 그게 아닐 것이다. 사업을 하던 엄마의 오빠(큰삼촌)가 거래처에서 받은 것을 예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여동생에게 매년 선물처럼 주던 달력이었다. 외할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엄마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큰오빠는 엄마에게 있어서 아버지 대신으로 큰 언덕이었다. 나한테 부담이 될까 봐 늘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는 엄마가 이 달력만큼은 나에게 매년 부탁하는 건 오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서, 매일매일 여동생을 향한 오빠의 애틋한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달랑 달력만이라도 부치고 엄마에게 전화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