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마음
오늘 아침에도 학교 가기 싫다고 미적거리는 딸에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게 어떨까!!!"하고 맘속으로 크게 외쳤다.
입 밖으로 내버리면 서로 마음만 상할 것 같아서였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서는 딸을 배웅하고 앉아 있자니 아까 맘속으로 외친 "후회"라는 말이 맴돈다.
어머니는 우리 친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다고 하는 "시집살이"라는 걸 나에게 안 시키신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결혼 전에도 이른바 "시어머니 노릇"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아들이 최고라고 생각하시는 건 있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들과 며느리를 저울에 재는 듯한 말씀도 태도도 없으셨다.
게다가 4남매를 잘 키워 내시고도 "늘 해 준 것도 없다"라고 하시는 겸손의 말씀이, 귀여운 우리 엄마의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키웠는데"와 대비되어 더더욱 어머니가 큰 어른으로 생각되었고 존경하게 되었다.
누가 시켰으면 절대 하지 않을 전화도 내가 하고 싶어서 했고, 꾸밈이나 가식 없이 내 안의 말들을 어머니와 나누었다.
어머니도 나를 늘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우리도 지금 우리 세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당신들의 노후는 생각할 여력도 없이 몸도 마음도 자식들에게 모든 걸 쏟아부으신 부모님들께 형편껏 송금을 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취직도 늦고 결혼도 늦고 아이들도 늦은 탓에, 지금도 저 살기 바빠 더 일찍, 더 많이 못 드리는 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너무 부족했다.
벌써 재작년이 되는 여름 방학,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갔을 때였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의 아침 운동에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봄에 보내드린 송금에 대해 고맙다고 하시며 한마디 덧붙이셨다.
"니는 남인데......"
짧은 그 한마디로 내 눈앞에 무겁고 두꺼운 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갑자기 어머니한테서 저 멀리 휘익 던져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어머니 말씀은 사실이었다. 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그 말씀에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냥 서글펐고 눈물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 남이 아니라 가족이잖아요"하고 능글맞게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나 싶지만
그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은 고마움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그 말은 고마움이 아니라 거절과 소외로 들렸다.
그날 이후, 난 점점 어머니에게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화 횟수가 줄었고 말수가 줄었다.
아이들이 나 대신 할머니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머니는 이런 나에게 시누이의 말을 빌어 "이제 전화하기 귀찮아질 때도 됐지..." 하셨다.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어머니가 싫거나 미운 게 아니다. 귀찮은 건 더더욱 아니다.
이런 나를 어머니는 꾸중하시거나 다그치지 않으셨다.
역시 "니는 남"이니까.....
내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져 갔다.
하지만
오늘 딸에게 맘 속으로 외쳤던 "후회"라는 말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되돌아온 건
내가 앞으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맘을 몰라 준다고,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어린애와 같은 마음을 더 늦어 "후회"하기 전에
나의 가장 가까운 남에게 어른스럽게 꺼내 보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