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테산도(表参道)보다 tacco

한 사람만을 위한 의자

by 혜준

내일은 한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 예약이 들어있다.

한국에서는 항상 울 언니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언니를 담당하는 분에게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라고 할 필요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 얼굴과 분위기에 맞게 척척 해 주셔서 너무나 편안하게 나름대로 외관을 정리할 수 있었다(내 미적 기준은 상당히 낮긴 하지만...).

그런데, 여기에서는 내가 직접 미용실을 찾아야 했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꽤 한참 동안 미용실 방랑을 했던 것 같다. 난 화장도 거의 안 하고 그저 머리만으로 여성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머리가 엉성하니 사람도 참 엉성해 보이기만 했다. 아무리 내면이 이렇게 곱더라도 말이다.

잡지를 뒤적여 도쿄에서 유명하다는 오모테산도의 미용실에 가도 뭔가 부족했다. 내가 원하는 건,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도 간이라도 빼 줄 듯이 상냥한 접객 태도도 아니었다.

미소도 인사도 필요 없다. 그저 거울 앞에 뻘쭘하게 앉아 있는 나를 한번 딱 보고 아무 말 없이 찰칵찰칵 가위로 내 머리를 오려 줄 분이 간절했다.

어디서 어떻게 그런 분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오늘처럼 우울한 날이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내 맘에 쏙 드는 미용실을 발견했다. 간판에는 tacco라는 다섯 글자만 달아 놓고 의자도 달랑 하나밖에 없는, 가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전면 유리의 아주 작은 미용실이었다. 차 안에서 봤을 땐 휴일이었는지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억한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인터넷에도 없는 미용실이었다. 장사하기 싫은 건가? 그런데, 그게 너무 맘에 들었다. 뭔가 세속에 영합하지 않는 장인의 냄새가 났다.

게으른 내가 꾸역꾸역 찾아갔다. 가 보니 일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나만큼 키가 큰 언니가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가게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단 둘만의 개인적인 공간을 내가 침범하는 것만 같은 특별한 분위기가 거기에는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유리문을 살짝 열고 "저......"라고 하니 키 큰 언니가 일손을 멈추고 뭐지? 이 여자는? 하는 눈으로 날 응시한다. 어머... 어서 오세용, 여기 앉으세용... 하는 분잡스러움이 전혀 없다. 용건을 이야기하니 새로운 손님은 받지 않는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지지 않고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애원했다. 지금 바쁘시니까 전화로라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언니는 아까운 걸 주듯이 명함 한 장을 건넨다. 과연 아까울 만큼 예쁜 명함이었다. 전화를 해도 괜찮을 시간을 다시 묻고 집에 돌아와 시계를 바라보며 전화를 걸 시간을 기다렸다. 연애도 이렇게 했으면 남편이 날 업고 다녔을 텐데......

막상 전화를 거니 너무나 새침하게 보였던 언니의 모습과는 달리 다정하게 대해준다. 밀당의 명수?

지금은 예약이 가득 차서 바로 해 드릴 수 없지만 연락처를 주면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다. 고마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약속이라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언니는 고맙게도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나에게 연락을 주었고 난 날아갈 듯 가서 얌전히 한 사람만의 의자에 살포시 앉았다. 언니는 거울로 내 얼굴과 머리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위를 찰칵찰칵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였다. 내가 원하던 서비스는.... 아니 서비스라고 하면 너무 가벼워 보인다. 대접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무슨 근거로 이런 훌륭한 대접을 받게 될 거라 알고 그렇게 애절하게 간청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감(感)이었다. 돗자리를 펴야 할까 보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1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도 언니는 내 스타일을 알아서 챙겨 주신다. 내가 가끔 좀 젊어 보이고 싶어서 앞머리를 만들어 달라고 응석을 부리면 코웃음을 치면서도 만들어 주지만 며칠 후엔 역시 언니가 코웃음을 친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반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젠 더더욱 입을 다물고 얌전히 머리를 내어 준다.

언니는 긴 세월 함께 해도 아직도 딸아이를 위한 예약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있다. 지금 있는 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란다. 이러니 내가 어찌 짝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딸아이는 대학 가면 생각해 보겠다고 할 정도로 언니를 구슬려 놓았다. 참 애절한 모성이다.


친해져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눌 정도가 되었을 때 내가 넌지시 물은 적이 있다. 새로운 손님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왜 그때 무작정 찾아간 나를 거두어 주셨는지를...... 언니가 말하길, 직업적 사명이었다고. 문을 빼꼼 열고 들이민 얼굴과 머리가 불쌍해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고. 어떻게든 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찔끔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간에 언니가 아파 입원을 한 기간이 반년 정도 있었지만 난 삽살개 같은 덥수룩한 머리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충견 하지코도 울고 갈 것 같다).

가라앉은 기분도 내일 언니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들고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조금은 부웅 떠 오른다.

내일은 가벼워진 머리로, 마음으로, 언니가 둘러 주는 커트보를 슈퍼맨 망토처럼 휘날리며 귀가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