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하여

비디오 대여점, 그 선명하고 소중한 기억

by 혜준

요즘 AI로 인해 사라지게 될 직업,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열심히 들어도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고, 결국 이야기는 늘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물음표로 끝난다. 아마도 내 이해 부족 탓일 것이다.


하지만, AI운운 이전에 우리 주위에서 슬며시 사라져 버린 것들을 느낄 때마다 새삼 놀라곤 한다.

당연히 있던 게 어느 틈엔가 사라진 것을 꼽으라면 난 단연 비디오 대여점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변화 속도가 느린 일본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여점이 보였었다. 그런데 아날로그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조차 하나 둘 폐점을 하더니 어느 날 다시 보면 그 자리엔 편의점이나 카페가 들어서 있다. 섭섭하고 쓸쓸하다.

아마도 비디오 대여점은 내 청춘의 한 페이지이기 때문이리라.


사비(私費) 유학생이었던 나는 집 근처의 작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당시의 대여점은 비디오뿐만이 아니라 CD와 만화책도 같이 대여를 했고, 혼자서 손님을 맞이하고 반환된 비디오와 CD, 만화책 정리를 하자면 가게는 작았지만 정신없이 바빴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어도 일본어지만, 작품들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잘도 기억했다. 손님이 물었을 때 바로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만 나면 가게를 빙글빙글 돌면서 암기하곤 했다. 그리고, 문의가 들어오면 망설임 없이 재빨리 달려가 작품을 찾아 드릴 때의 보람과 만족감은 돈으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손님이 대량으로 대여나 반납을 할 때, 내가 실수라도 해서 줄이 길어지거나 하면 손님은 팔짱을 끼고 혀를 차면서(일본에서 혀를 차는 행위는 상당히 실례에 해당됨) 재촉해 식은땀을 흘리기 일쑤였다.

일본이 아무리 성(性)에 관용적이라 해도 AV(Adult Video) 코너는 나에겐 금지구역이었는데, 그곳은 커튼이 쳐져 있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점잖으신 사장님은 남자 직원에게만 입장을 허용하셨다.

지금이라면 몰래라도 들어가 봤을 텐데.... 당시의 내 순진함이 조금은 아쉽다.

내가 카운터에 있는 날이면 AV를 빌리러 온 남자 손님들도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결국 그냥 빈 손으로 가거나 반납하러 왔어도 내놓고 가는 손님은 극히 드물었다.


손님이 없을 때 몰래 꺼내보던 만화를 통해 우라사와 나오키(浦沢直樹), 토가시 요시히로(冨樫義博)등 일본 만화의 깊이를 알았고, J-POP에 대해서도 박학다식(?)해 졌다. 점원 특별 대우로 제공되는 신작 샘플 비디오테이프(VHS) 증여와 무료대여제도로 난 영화를 원 없이 실컷 볼 수 있었다.

나와 교대로 들어오는 키가 크고 머리가 긴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보란 듯이 불에 살짝 그을려 피우는 수상한 것을 실실 웃으면서 시연해 주기도 했다. 아마 난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멍청하게 따라 실실 웃었을 것이다. 다소 불온하고 불건전하기도 했으며, 그리 청결하지도 않았던 공간. 그 작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나는 약 2년을 보냈다.


이제는 신작의 출시일을 몰라서, 혹은 빌리러 가도 이미 대여 중이라 헛걸음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되고, 깜빡하고 반납을 못해 연체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부끄러워할 필요 없이 편하게 집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비디오 대여점을 사라지게 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헛걸음의 기억, 억울했던 기억, 부끄러웠던 기억,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모든 기억들은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져 버린 이후에 추억으로 남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그 기억은 더더욱 소중하지 않을까.


지금도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터질 것 같은 반짝이는 청춘들이 눈부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내 청춘의 비디오테이프는 이미 다 돌아가 멈췄을지라도, 그곳에 기록된 나의 땀과 웃음은 삭제될 수 없는 데이터로 남아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 또한 이 세상이라는 대여점에서 "반납"되어 사라지겠지만,

그 사라짐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명작 영화 한 편처럼 선명하게 추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존재와 삶은 결코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