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세상
봄이라고 하는 어느 날, 김노인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봄날이라고는 하지만 밖은 조금 쌀쌀했다. 보훈
병원 가는 날은 서둘러 집을 나선다. 지각하여 담당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거니와 곱지 않은 대꾸
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늦은 사정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남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병을 앓는 것보다 더 싫었다. 빠른 걸음으로 버스정류장
에 도착한다. 3007 번은 아직 몇 정거장 전에 있는 게 안내판에 표시되고 있었다. 매 번 서두른다고 부지런을
떨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정류장에 도착하는 예가 드문 게 자신에게 불만이다. 이제 늙어 동작이 느린 게 원인
일까? 생각해 보지만 딱 부러지게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벌써 정류장엔 젊은 사람들 몇 명이 줄을 서있었다.
아무튼 한 참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하고 김노인은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탄다. 앞 좌석에 자리를 잡고 배
낭을 내려놓자마자 안전띠를 찾아 착용한다. 김노인이 매 번 틀림없이 이행하는 순서다. 버스가 흔들리는 대
로 몸을 맡기도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차에서 나는 소리와 거리에서 나는 소음이 섞여서 귀
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새벽녘에 깨어 제대로 못 잔 탓에 악간 피곤 하긴 한데도 잠은 가까이 오지 않
았다. 사실 버스 안은 조용한 편이다. 엔진 소리만 빼면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스마트폰에 얼굴을
숙이고는 엄지를 재빠르게 놀려 무언가 찾고 있다. 그들은 주위의 상황 같은 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횡
단보도를 건너면서 아니 자전거를 타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세대이니 편안히 앉아 있으면 되는 버스
에서야 두 말하면 잔소리지.
오늘 탄 버스는 TV도 꺼 놔서 눈을 끌만한 것도 없는 형편이다. 김노인은 다시 눈을 감아본다. 얼마가 지나
도 역시 잠은 먼 곳에 있는가 보다. 안전을 위하여 안전띠를 착용하시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탑승한 사람
들이 움직이는 낌새가 없었다. 마치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막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는 중이
었다. 도로는 질서 있게 차들이 흐르는 것 같지만 실은 경주를 하는 상황이다. 어떤 뱃장 좋은 승용차 운전자
는 버스전용차로를 버젓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카메라가 없는 구간인 모양이었다.
잠깐 조는가 했는데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급히 휘어지는 도로에 들어서는 걸 느낀다. 서초동쯤에 들어선 것
같다. 김노인은 종점에서 하차를 제대로 하기 위해 조금 긴장하고 있다. 강남역 1번 출구를 향하여 부지런히
걷는데 여기가 제법 붐비는 곳이다. 익숙한 순서에 따라 화장실로 향한다. 강남역에서는 무조건 화장실을 들
려야 한다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거다. 그래야 병원까지 한 시간 남짓동안 안심하게 되니까.
오늘이 수요일인데 정거장은 무지하게 붐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덩치가 작은 김 노
인은 완전히 사람들 틈에 끼어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속으론 몹시 불안하다. 몸이 공중에 뜬 것 같
으니 손잡이라도 잡아야 한심이 될 터인데, 김노인을 둘러싼 한 무리가 움직이는 대로 밀려다니는 신세가 초
라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별 수 있나? 가야만 하는 길이니 이 고난을 견디어 내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의 압력에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강남에서 종합운동장역까지 네 정거
장인데 선릉역에선 승객이 좀 빠져서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종합운동장역에서 하차하여 9 호선 차를 타려면 긴 계단을 내려가고 교통카드를 중간에 한 번 사용하고 또
내려가야 한다. 오늘은 운이 좋아 급행을 탔다. 오래 앉아있는 게 좋지 않아서 대개는 서서 종점까지 가는데,
해가 바뀔수록 차츰 자리가 있으면 앉게 된다. 이것도 나이 탓일 게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접수를 끝내고 식사를 했다. 아침 시간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식판을 들고 빈 자
를 찾아야 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한다. 식사 후 3 층의 조용한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내려와 정형외과 키오스크에 등록하고 들어선다. 이제 실내의 풍경이 낯익어 김노인이 대기할
진료실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본다. 아직 이름도 뜨지 않으니 눈을 감아본다.
그러나 불안하여 곧 눈을 뜬다. 내 이름이 곧 뜰 것이며 내 차례를 놓치지 않고 진료실로 가야 한다는 강박감
이 결코 눈을 감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정형외과는 의사와 대화가 간단하게 끝났다. 아직 골밀도 검사 할 때
가 몇 달 뒤이기 때문에 남은 기간에 먹을 약을 처방받으면 되는 것이다
정형외과를 나와 신경과로 간다. 호명에 따라 진료실에 들어간 김노인은 신경과 의사 선생님이 묻기 전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먹는 약이 많아서 아침에 먹는 약은 먹지 않았다고 하고 저녁에 먹는 두 가지 약은 빠짐
없이 먹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증세는 그만하냐고 물었다. 그만하다고 하니 알
겠다고 하면서 저녁에 먹는 약만 처방하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왜 안 먹었느냐고 꼬치꼬치 물으면 이유를
대기가 궁색했을 것이다. 이유라면 현재 먹고 있는 약이 많기 때문이긴 했다. 해가 갈수록 먹어야 하는 약은
늘어나고 줄지를 않으니 그게 싫었던 것이다. 나오기 전에 혈압을 잰 결과 쪽지를 내밀었다. 오늘은 혈압을
꼭 측정해야 한다고 접수창구에서 강조하여 오랜만에 혈압을 재보았다.
원무과 창구에서 처방전과 예약증을 받고, 약방에서 약을 받아 보훈병원 지하철종점으로 가면 된다는 간단한
절차가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그런데 여러 해를 보훈병원에 다녔지만 세명의 전우 외에 더는 전우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하기는 나는 만나기를 고대하지만 전우들이 다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
각이 든다. 이제 셋 중에 한 사람만 남아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고 있는 처지이다.
지하철을 타고나서 긴장이 풀어졌다. 집에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을 게 없다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오늘
못읽은 신문을 배낭에서 꺼내 들고 1 면부터 훑어본다. 2 면 3면까지 보다가 졸음이 와서 신문을 배낭에 넣고
눈을 감는다. 올 때는 잠을 청해도 안 오더니 갈 때는 잠이 오는구나 하면서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밤에 제대로 못 잔 것을 보충한다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차량이 흔들리는 데 따
라 몸이 흔들리고, 김노인은 매 역마다 해주는 안내방송도 들리지 않았다.
배낭을 끌어 안은채 노인네의 표를 내는 듯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이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노인은 잠이 깨었다. 흐리멍덩한 머리를 들어 모니터를 찾아본다. 서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안내방송을 기다린다. 몇 분이 지났을 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번 역은 서정릉
역입니다." 뭐 서정릉역이라고? 이런 몇 정거장이나 지나친 거야? 지난번에 배탈이 나서 지하철로 갈 때 서
정릉역에서 내렸었는데, 역명을 듣는 순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김노인은 당황한다. 순간 머리는 하얘지고
눈앞은 캄캄 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무슨 차를 탔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
다. 사람들은 조용하게 움직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김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까 종합운동장을 지
나쳐 왔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내려야 한다는 결정을 한 정거장 지나서야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하철을 타
고 왔는데 어느 역에서 내렸다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멍 하니 서 있다가 저만치 의자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선 앉아서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열차
가 지나가고 다시 열차가 들어오는 동안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것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귀에서는 쓸데 없
는 소리가 역에서 나는 소리를 압도한다. 이놈의 이명을 고쳐야 하는데 병원에 가봐야 연로하여 그렇다고 하
며 적당한 약을 처방해 주면 그걸 언제 까지고 먹으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게 뻔하기도 하거니와 그 번한 것이
싫어서 이비인후과에 가지 않고 있다. 주변에서 나는 소리가 강하면 잊고 있다가 다시 소음이 잦아들면 이명
이 귀를 괴롭게 울리기를 반복한다.
목이 마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먹고 약 먹을 때 물을 마시고는 아직 물을 한 모금도 먹지 않은 걸 생각
해 낸다. 집에서는 늘 따뜻한 물을 먹어 버릇해서 밖에 나와서는 배낭에 물이 있어도 잘 먹지 않게 된다.
배낭을 뒤적여서 페트병을 찾아 한 모금 마신다. 목을 타고 시원한 물이 넘어가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도 같
다.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세 시간 반쯤에 마신 물이 효과를 발휘하였나, 정신을 가다듬어 맞은편 벽에 써있
는 역명을 읽어본다. '신논현'이라 되어있다. 허리에 찬 스마트폰을 꺼내서 지하철노선도를 찾아본다. 종앙보
훈병원부터 시작해서 9호선을 따라 훑어 가니 종합운동장역을 지나 몇 정거장에 '신논현'이 있었다.
여러 역을 지나친 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니 허탈 해진다. 알았다. 속으로 뇌이고 갈아타기 위해 개찰구를 찾
아 나간 다음에 신분당선 타는 곳을 찾아 교통카드를 대니 어떻게 된 건지 다시 대보란다고 한 다음부터는 뭐
라고 멘트가 나오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털컥'하고 막아서는 판때기를 겨우 넘어서
몇 걸음 걷자 역무언이 쫓아와서는 '어르신 그렇게 막 넘어오시면 안 됩니다." 하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김노인은 "내가 쓰던 카드인데 왜 여기서는 안되는지 모르겠네요. 저쪽에서 나올 때는 잘 됐는데"하고 카드
를 보여주었다. 역무원은 카드를 받아 들고 "따라오세요." 하고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사무실에서는 김노
인 보고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귀찮다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김노인을 데리고 간 역무원은 카드를 어떤 기
계에 올려놓고 간단히 처리한 뒤에 김노인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평소 같으면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보았을
거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도 하기 싫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와 행선지 방향을 보지 않고 신
분당선을 탔다. 그런데 탄 지하철 방향은 '신사'쪽이었다. "이런 또 실수를 했네."
논현역에서 내려 반대로 가는 방향으로 건너 가는데 역시 개찰구에서 판때기가 덜컥하고 막는다. 기다리지
않고 판때기를 넘어 광교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이제 김노인은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왜 자기가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남역에서 내려서 개찰구를 통과하여 한 참 헤매
다가 늘 통과하던 7번 출구 표시를 발견했다. 그제야 자신이 보훈병원 가고 올 때마다 늘 지나치던 지하상
상가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 내가 속이 비어 있었어, 아침 먹은 지 다섯 시간쯤 지났을 거야. 뭘 좀 먹어야
겠다." 매번 어묵 한 개만을 먹던 가게에 들어가 김밥과 어물을 시키고 걸상에 앉아 기다린다. 음식은 준비가
항상 되어있는 거라 곧 나왔다. 따끈한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그게 위에 도달할 때 벌써 신호가 온
다. 몸은 필요한 에너지원이 들어가는 즉시 반응 했다. 몸이 이렇게 되도록 뭐 한 거야? 자책한다. 그리고 이토
록 아주 작은 차이로 왔다 갔다 한단 말인가? 정말 시원찮은 몸뚱이야, 나는.
"그래, 내가 가끔 깜빡깜빡 하지만 아직 치매는 아닌 것 같아. 오늘 좀 어지럽고 헷갈려서 당황한 건데---
끼니는 거르지 말고 제때 먹어야 하지 않겠나. 뭐가 바빠서 밥도 제때 못 먹어? 앞으론 조심해야지.
집을 나서면 약간은 긴장을 해야 해. 멍청하게 지내면 무언가 꼭 탈이 난단 말이거든. 잊은 게 있다면, 생각이
안 날 때는 주저하지 말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창피한 것 따지지 말고 물어봐야
되는 거야.
그런데, 오늘은 헤매고 있어도 물어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전에는 안내판이나 표지를 들여다 보고 있으
면 젊은 사람이 와서는 "어디를 찾으십니까?" 하고 물어 보더구만. 그렇다고 서운 하지는 않아, 각자 살기 바
쁜 세상이니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지. 7 번 출구에서 밖으로 나오니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천천
히 걸었다. 나라빌딩 앞에 도달하고 3007번이 올 시각을 확인한다. 들쑥 날쑥한 표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
고 할 만한 점이 있다. 버스에 몸을 싣고서야 아들에게 문자 보낼 생각을 한다. 집에 가면 한 소리 들을 것이
다. '버스 탔음' 문자를 보내고 안전띠를 차고 차창 밖으로 지나는 조금은 익은 풍경을 보며 페트병물을 한 모
금 마신다. 김노인을 실은 버스는 적절한 속도로 수원을 향하여 달렸다. 김노인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안심하
고 의자에 기대어 지나치는 산들의 울창한 숲을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자랑스러운 푸른 숲에 고마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