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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두 민씨 왕후의 운명과 엇갈린 국운

2025년 부인을 위해 악전고투한 한 남자의 운명은

by 풍천거사


조선의 시작과 끝에 두 민씨 왕후가 있다.

시작은 태종 이방원의 중전 민씨 원경왕후이고, 마지막은 망국의 기폭제인 고종의 처 민비다.


두 민씨의 엇갈린 운명이 조선의 국운을 결정했다. 원경왕후는 정권의 공동창업자였으나 태종의 배신으로 멸문지화에 가까운 치욕을 당했다. 반면 배신남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철저히 차단해 신생국 조선의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지아비로서는 개쓰레기였지만 군주로서는 탁월했다.


조선은 혈족의 피로 열었다. 태종 이방원이 두 차례의 왕자의난으로 집권했다. 선왕 태조 이성계가 자식 관리를 잘못한 게 1치책임이고, 이방원의 과도한 권력욕이 2차 책임이다.


부전자전이랄까? 이성계-이방원 부자에게는 부인 복이 있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가, 이방원은 원경왕후 민씨가 뒷배가 됐다. 두 부인은 탄탄한 재력이 있었다. 특히 민씨는 명문가 출신으로 스폑이 화려했다. 부친 민제는 고려말 한양 판윤을 지낸 당대의 세도가였다.


신덕왕후는 탄탄한 재력을 기반으로 함흥 변방 무장출신인 이성계를 중앙무대에 데뷔시켰다. 조선왕조 개창에서도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다했다. 다만 명이 짧아 40세 나이에 요절한 탓에 아들 둘이 이복형에 의해 비명횡사했다.


반면 원겸왕후는 여걸이었다. 남편 이방원 못지않은 지략과 담대함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했다. 정도전 일파의 이방원 암살 기도룰 감지해 사전에 회피케 했고, 거사에 주저하는 이방원에게 갑옷을 손수 입히는 강단을 보였다. 이 장면이 제1차 왕자의 난 백ㅇ미이고, 공동창업자라고도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까지였다. 태종은 조선을 위해 아내를 버렸다. 처가를 철저히 짓밟아 장인 민제를 제외하고 처남 4형제를 척살했다. 장인은 사위의 인간성을 알기에 자중모드로 일관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아들들의 전횡울 막지 못해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경왕후도 공동창업자에서 힘멊는 아녀잔로 전락했다. 믿었던 양녕대군도 아버지의 잔인무도한 외갓집 학살에 왕위를 포기해 半미칙괌이로 살았다. 태종은 처가뿐만 아니라 세종의 장인 심온도 죽이고 사돈집을 패가망신시켰다.


태종은 외척 피의 댓가로 새나라 조선의 기틀을 잡았다. 인척의 도리 대신 국가를 선택한 군주의 진가를 보였다.


450여 년이 훌렀다. 조선에 또 한명의 민씨 왑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망국의 신호탄이 된 민씨다.


민비는 공동창업자도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라고 초대됐지만 밥상을 뒤집었다. 밥상 주인인 시아버지를 내쫓고, 새 밥상을 차렸다.


못난 지아비 고종도 마누라 치맛폭에 휩싸여 권력만 탐했다. 경제도 모르는 주제에 유통화폐 청전(淸錢)을 금지시켜 곳간을 진공청소시켰고, 민씨 척족의 세상을 열어줬다. 옛도작 안동김씨가 물러가자 新도적 권력거지인 민씨가 들어섰다. 30여 넌 전 군화가 물러나니 등산화가 판을 쳤다는 우스개 소리가 연상된다.


시계가 대원군 이전으로 돌아섰다. 매관매직과 탕학이 일상이 됐다.

결국 민씨 척족의 탐학에 참다 못한 구식군인과 도시 빈민들이 임오년에 봉기하자 외세를 끌어들여 백성을 살육케 했다. 동학 봉기도 외세를 끌어들였고. 청일잔쟁을 자초했다. 시류에 따라 친청, 친러 등 외세에 빌붙어 국가이권을 착취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민비는 또 다른 외세 일본 낭인에 의해 척살됐다. 왜곡된 척살 장면이 드라마와 뮤직비디오로 미화됐지만 일본 낭인들에게 치욕적인 죽임을 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종은 꼴에 남자라고 민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엉상궁을 안방에 들였다. 결국 죽은 민비도 고종의 마지막 사랑이 아니었다.


고종은 부인을 선택하고, 나라를 버렸다. 조선은 이렇게 망했다.


태종과 고종의 두 여인 민씨 왕비들, 둘의 최후는 비참했지만, 국가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2025년은 난세다. 부인을 위해 악전고투한 탄핵심퍈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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