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재밌는 혹은 자신이 아주 몰입한 사랑하는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과 대화할 때 ‘너 그거 아직도 안 봤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가끔 ‘안 본 뇌 삽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 표현 자체가 인터넷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인터넷 주접 글의 형태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에 현실보단 인터넷 세상에서 흔한 표현이다. 의미는 내가 이걸 본, 경험한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체험하는 순간을 되찾고 싶다는 의미다. 그럼 과연 다시 안 본 뇌로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일까? 이 글에서는 안 본 뇌를 사는 것을 혹은 파는 것을 생각해 보려 한다.
안 본 뇌를 산다는 건 합리적일까? 당신은 안 본 뇌를 얻고 다시 생생한 경험을 반복 가능할까? 안 본 뇌와 본 뇌의 거래가 성립된다면 당신이 안 본 뇌를 갖게 되고 다른 이는 본 뇌를 얻게 되는 것이 거래의 조건이다. 자 이렇게 안 본 뇌를 사게 되었다. 경험의 매매가 성립됐다는 뜻이다. 당신이 판매자로서의 매매가. 그럼 당신이 너무 재밌게 본 ‘뽀로로’를 틀어 시청한다면 과연 재밌을까? 완전한 첫 경험이 되는 것이라면 어린 시절 당신이 열광하던 뽀로로를 보는데 20~30대 조금 더 간다면 40~50대까지 간 당신에게 뽀로로가 재밌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지금 하츄핑을 본다 상상해 봐라. 아니면 앞으로 나올 어린이용 콘텐츠를 소비하는 걸 상상해 본다면 분명 처음 보는 것이고 어린이는 열광하는 그 콘텐츠를 당신도 열광할 만큼 빠질 확률은 현저히 낮다.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가 뽀로로를 다시 보고 싶어서 기억을 없애겠는가? 그럼 세계적인 만화 ‘원피스’를 생각해 보자. 소년 만화의 대표인 만화다. 소년 만화답게 당시 소년의 욕망을 대변하고 소년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40대가 되어 원피스를 안 본 뇌로 보는 건 꽤나 고역일 것이다. 40대 아저씨는 그렇게 뜨거운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요즘에도 소년 만화는 많이 나온다. 여전히 소년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소년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40~50대가 되어서는 새로운 소년 만화는 소비하지 않는다. 이미 본 것을 아니면 아저씨가 된 나를 위한 작품을 찾는다. 안 본 뇌를 산다는 건 10대 시절 가슴을 뜨겁게 한 작품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 본 뇌를 산다는 것이 불합리한 이유다. 당신이 한 경험은 온전히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게 아니라 당신의 환경과 상황도 거대한 영향을 받는다. 지금 당신의 변화한 상황에서 동일한 작품을 다시 본다면 똑같은 경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른 이야기로 본다면 최근 인기를 끈 ‘흑백요리사’라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예시로 들 수 있다. 흑백요리사를 직접 본 사람보다 흑백요리사 클립을 쇼츠를 통해 본 적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흑백요리사를 본 적이 없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클립을 보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짧은 시간을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자극적인 부분을 클립으로 만든 것도 맞고 쇼츠 특성상 찾지 않아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클립을 본 다른 이유는 흑백요리사라는 인기 절정의 콘텐츠에 관한 호기심 해결과 사회적 연결망 하나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 이런 소비가 콘텐츠를 즉시 획득하는 본 뇌를 사는 욕망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그럼 이 거래는 안 본 뇌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본 뇌에 안 본 뇌가 돈을 지불하여 그 데이터를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회 아닌가? 우리는 이미 유튜브가 영화 15분 몰아 보기 결말O 형식의 영상에 지배된 적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2026년 3월 5일에도 유튜브에 이런 형식의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영화를 본 뇌를 사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조금 더 데이터, 영화의 정보에 치중된 느낌을 지우긴 힘들다. 그래도 청소년인 아들과 보다 친근한 대화를 위해 원피스를 본 뇌를 사는 것이 원피스를 본 뇌를 파는 것보다 의미 있지 않을까? 비단 원피스가 아닌 자신의 자녀가 소비하는 콘텐츠에 대한 뇌를 사는 것이 자녀를 이해하기에 훨씬 합리적인 소비 아닐까? 원피스를 본 뇌를 산다는 건 원피스라는 작품의 내용(정보)+감각(경험)을 동시에 사는 결과가 된다. 경험할 시기를 놓친 어린 시절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도 새로운 것을 통한 신세대와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기억 속에 깊이 좋은 경험으로 각인된다. 열심히 그것에 열광한 뇌를 전달받기 때문이다. 그것도 조금의 손실도 없이, 재미없을 걱정 없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콘텐츠를 즉시 획득한다. 앞서 말했듯 이것의 마이너 체인지 버전이 이미 유튜브를 통해 시장에 풀린 시대에 산다. 안 본 뇌를 사는 것보다 본 뇌의 가치가 높지 않을까?
이런 세상이 온다면 콘텐츠의 소비 양상의 변화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처럼 영화, 연극, 소설 등으로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경험, 연극+경험, 영화+경험 등으로 콘텐츠가 이동한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이미 재미를 확정적으로 얻기 위해, 긴 콘텐츠를 빠르게 소비하고 알기 위해 유튜브 영화 요약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영화의 제작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영화를 소비하고 획득한 각종 정서적 경험까지 같이 준다면, 영화의 내용에 관한 정보와 그 어떤 내용이든 강렬하게 즐긴 경험을 단숨에 획득하는 걸 마다하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를 관람한 경험을 사는 걸 마다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영화만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영화 관람이란 직업이 탄생하고 그들이 느낀 찬란한 환희와 영화 내용을 동시에 판매하는 사회다. 이것이 안 본 뇌를 사는 것보다 합리적인 이야기 아닐까?
물론 ‘안 본 뇌 삽니다.’를 이런 합리성을 반하면서까지 다시 처음으로 즐기고 싶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최상의 반어적 극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