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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4. 2022

전설의 영화 <라쇼몽>을 보다

오늘날의 진실이란?

‘사라(접시), 기스(흠), 오야봉(우두머리)’ 같은 단어를 쓰면 매국노(?) 비슷한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단어들을 ‘디시, 스크래치, 캡틴’이라고 쓰면 오히려 좀 있어 보이는 어설픈 사대주의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시절에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론 멀고 먼 일본 문화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런 정서 속에서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일본 영화 <라쇼몽>(구로자와 아까라, 1950)을 최근 영화로 보게 된 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가끔 개인적으로 ‘라쇼몽 효과’를 -동일한 것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보고 해석- 말이나 글로 인용할 때마다, 대충 글자로만 의미를 알고 썼던, 께름칙함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라쇼몽>의 철학적 기저는 ‘상대주의’다. 그러나 현대 시각의 연출 적 측면에서 본다면 수준이 좀 떨어지는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과다할 정도로 잦은 배경음악과 나무하러 가는데 지게 없이 -물론 일본에는 지게 같은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 도끼만 들고 너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과장된 나무꾼의 설정, 그리고 사무라이라고 하기에는 칼 솜씨가 처지는 남편 등등.     


게다가 등장인물 7인(남자 5과 여자 2인)과 버려진 갓난아이 1명, 소품으로 쓰인 말 한필과 칼 몇 자루, 세트장이라고는 라생문(羅生門) 간판이 걸려 있는 폐가와 산속 이곳저곳, 관가 앞마당이 전부인 아주아주 저예산 영화다. 요즘 독립영화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 만든 이 영화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세계 3대 영화제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다중 시점(多重視點)’의 차원에서 본다면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심장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그린 영화 <강원도의 힘>(홍상수, 1998)을 20여 년 전에 우연히 보고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의 연출 방식이 아주 낯설지만 않았다. <힐러리와 재키>(애넌드 터커, 1998)도 그런 종류의 영화로 분류되지만 직접 관람은 못하고 이번에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라쇼몽>은 한 사건을 특정인의 시점으로만 그리지 않고, 해석하는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 주면서도 그 상황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 영화에서 진실은 ‘성폭력 당한 아내와 살해당한 혹은 자살한 남편 사무라이’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다 상이하다. 각 진술자의 설명만을 영상으로 보여줄 뿐, 실제로 발생한 사건 전부를 보여 주지 않는다.     


만약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이 영화의 관점을 단지 산속에서 발생한 ‘성폭력과 주검’이라는 사건의 시각으로만 그렸다면 -혹은 나무꾼이나 도적이나 빙의된 남편의 시각 등등- 단순한 성폭력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일까? 영화는 진실이라는 것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진실 판단은 유보하고 모든 것을 의심케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 의해 여하한 진리도 파악될 수 없다고 단정’하던 중세 초엽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 잠시 접했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주장과도 오버랩된다.     


‘모든 것을 의심해 본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라는 말로 대치할 수도 있다. 진실(진리)은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 실례가 ‘간통죄’다. 한 때는 진실(합법)이었지만 지금은 폐지(2015)된 법. 이것은 과학의 진실은 대부분 발견에 의하지만, 가치나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 본성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일본 강점기를 우리는 ‘치욕의 역사’로 인식하지만, 일본 젊은이들은 이웃국가(대한제국)를 근대화시킨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진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이런 논리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회의’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부정’이 아니라 근데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프랑스 철학자 1596-1650)와 데이비드 흄(영국 철학자 1771-1776)이 말한 것처럼 철학적 회의를 의미한다. 즉 어떤 대상이 참인지 또는 거짓인지 알 수 없어 모든 것을 ‘의심’ 해 보는 회의다.     


‘감각’(특히 시각과 청각)에 바탕을 둔 믿음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의심해야 한다. 이 감각들이 가끔 자신을 속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우리를 속이는 감각은, ‘부분적으로만 신뢰’하는 것이 좋다. 진술의 참됨을 의심하는 것과 진술의 거짓됨을 믿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점이라도 의혹이 있는 믿음은,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라쇼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같은 사실이면서 다 다르게 봄- 보다 분명해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볼 때 총선이든 대선이든 그 기간 동안 ‘라쇼몽 효과’는 극에 달한다. 같은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여당과 야당의 말은 선거가 끝난 후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취사선택의 추태 그 자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이전투구에 빠진 그들에게 진실이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이렇게 회의적인 시각에서 진실에 다가가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평생을 구성하는 ‘기억’(자신이 경험한 진실)의 총집합이 환상이라면? 즉 정부의 에이전트가 자신의 뇌에 심은 메모리칩에 따라 생산된 결과라고 말하는 영화가 <토털 리콜>(폴 버호벤, 1989)이다. 그런데 만일 화성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은 리콜사에서 심어준 기억이라면, 그것을 (주인공이 하우저) 사실이라고 영화 내내 생각했던 우리는 속은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말하는 이 영화는 그래도 꿈이 아니다.     


하지만 “꿈의 세계와 실제 세계의 차이를 어떻게 아느냐?”라고 물으면서 꿈과 현실 (진실과 거짓)을 대놓고 섞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든 영화가 <매트릭스>(워쇼스키 형제, 1999)다. “당신은 지금 현재 꿈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대사에서는 더 황당하다. 만일 꿈속의 일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 또한 우리가 감독으로부터 기만당한 거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로나19 이후 뉴 노멀이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기준- 되면 지금의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가령 가톨릭 신자는 국내든 해외로든 출장이나 여행을 가게 되면, 현지에서 꼭 미사엔 참석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그건 진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안 드려도 괜찮게?) 되면서 ‘미사에 반드시 참석해야 된다.’라는 오래된 진실에, 살짝 실금이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이처럼 허약하다.     


영화 <페이스 오프>(오우삼 감독, 1997)에서도 얼굴은 가면처럼 바꿀 수 있고 교환할 수 있어서 거짓일 수도 있지만, 정신과 기억은, 심지어 버릇(?)은 진실이기 때문에 변질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올바른 앎(원칙)으로, 즉 어떠한 경우라도 지식(진실)을 지식이 아닌 것과 구별해주는 기준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에, 그 문턱에, 우리는 서 있다.     


오래전에 읽었던 [진실의 가장 큰 벗은 세월이고 가장 큰 적은 편견이며... 거짓말은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라는M.B. 에디의 시구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7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지금 보아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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