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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0. 2022

단 한 번과 마지막 추억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깼다. 한두 시간밖에 자지 못한 새벽이다. 몇 시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이리저리 돌아눕거나 바로 누워 이런저런 책이나 자료를 읽어댔다. 그러다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필기구들을 이용해 줄을 긋거나 그때그때 내 생각들을 적곤 했다.     


이럴 땐 연필이어야 한다, 중력 때문인지 몰라도 얼굴 위로 책을 들고 거꾸로 쓰는 볼펜은 잘 써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필기구들이 내 가까이 있다 보니 가끔 잠에서 깼을 때, 방금 꾼 꿈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 흔적을 찾아 적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아주 오래된, 요긴한 내 습관들이다.     


그러던 중 불현듯 문장 몇 개가 머리를 스쳤다. 그것도 짧은 영어 문장이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지나가는 밤비 소리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바로 누운 자세에서 엎드린 자세로 바꾼 나는, 메모지에 그것들을 휘갈겼다.     


<It's not love if it's too painful/ After you passed away like saying goodbye/ After you buried you I sit in front of a wine and shed tears...>     


그렇게 써내러 가다 문득 (...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이 난다...)라는 대목에서 어떤 낯익음을 발견하고선 마음이 서글펐다. 방금 전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내 창작물이 아니라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의 일부였던 것이다. 초저녁에 간단한 반주가 있었지만, 그 숙취가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 your voice... Let's us now bury the words we've missed... too painful love was not love> 가난한 영작 실력으로 몇 문장을 더 잇고는 잠을 잊어버렸다.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숙면에 효율적인(?) 책도  꺼내 읽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읽고 쓰면서 뜬눈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지지난 여름 코로나19 전, 어느 여름 밤비를 들으며 캘리를 치고 있을 때 강사가 틀어 줘 조우한 노래가 그 노래였다. 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스쳐 듣던 노래였다. 하지만 그날 그 노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조각칼이 되어 내 심장을 찔러댔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면 뭘까? 얼마나 아픈 사랑이면,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싶은 걸까?) 창밖 밤비는 무심하게 그칠 줄 몰랐다.      


그 이후 나는 틈나는 대로 유튜브를 통해 김광석을 만났다. 그때 첨으로 알았다. 그가 부는 하모니카 선율도 클래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 <클래식> ost나 가수 양하영 등 여러 가수들의 버전을 통해 <너무 아픈 사랑은 ~>이라는 노래 듣기를 자주 했다.


일어 나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샤워 후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다. 통영엘 가 보고 싶었으나 날씨도, 시간적으로 불가했다. 게다가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새벽 출사를 포기할까 하다가 어차피 이 새벽 잠들지 못할 거라면, 바닷바람과 일출이라도 만날 볼 작정이었다. 어둔 새벽길을 달리다 말고 피곤해, 잠시 차를 세우고 눈이라도 붙여 보았지만 그 짧은 토막잠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날은 새벽부터 그렇게 엉망이었다. 점심도 거른 채 다시 귀가해 침대에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늦은 오후에 잠에서 깬 나는, 전날 저녁도 시원치 않았고 아침과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도 도무지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시장기보다 더 아픈 것이 내 가슴 저 밑에 똬리를 틀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 그 잊힌 기억들이 소리 없이 시나브로 다가온 것이다.     


기억은 이렇게 질기고 힘이 세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진듯하지만 결단코 아니다. 그것은 비와 눈을 통해서 혹은 어느 단어나 글 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도 소환된다.  오래전 2박 3일 산행을 마치고 설악산 비선대 산장에서 막걸리 한잔에 홍조 띤 벗들과 찍은 오래된 사진을 최근 우연히 보고 울컥했다. 그때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기억은 언제든 그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가능성을 믿는 거고, 추억은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김광석의 노랫말과  내 젊은 날 빛바랜 한 장 사진은 내게 있어 기억인지 추억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추억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과 마지막이란 뜻'이 상존해 있다는 것이다. 단 한 번과 마지막인 추억은, 너무 가슴 아픈 것이다.


<김광석이다. 늘 그랬든 것처럼 관계가 오래갔으면 하는 것들과의 작별은, 생각보다 너무 이르게 다가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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