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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0. 2022

나는 네 마음에 세 들어 산다

세상엔 온통 안개뿐...

오늘 안개가 짙다. 땅이 차서 혹은 공기가 차서,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 그 안개 때문에 바로 앞서 가고 있는 차 넘버가 잘 안 보일 정도다. 마치 흐릿한 벽 속에 갇힌 듯, 들어온 구멍도 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J>를(차 별칭) 몬다. 그냥 걷는 것보다도 느리다. 너무 느려서 그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 느려서 느껴지지 않은 뿐 움직이고는 있다.     


봄꽃이 북상하는 속도는 하루 22km고 단풍이 남하하는 속도는 하루에 25km 란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시간에 약 1km다. 하지만 지금 나는 봄꽃 보다고, 단풍보다도 느리다.     


그때 차가 며칠 전 다운로드하여 USB에 저장해 놓은 것들 중에서, Yuni Geon이란 이의 목소리로 시 한 편 골라 들려준다. 소리가 곱다. 귀에 익지만 제목 모르는 배경음악과 함께.     


<나는 네 마음에 세 들어 산다>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고 미움은 더욱 없고 원망도 없다     

사랑만 안고 뚜벅뚜벅 새벽안갯 속을 걸으면 된다 나의 시선이 안에 머물면 된다     

인간이란 가슴을 내어준 사람만 가슴을 받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약속이 아니라 해도     

구름처럼 흐르는 세월이라 해도     

꽃 피고 새 절로 울어 가득한 뜰에 나는 모른다     

그저 나는 그저 네 마음에 세 들어 산다     

해도 달도 별도 그림자도 없는 시간 중에서     

너의 시선 속에 내가 머무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새벽 안갯속에 멀뚱히 서있다 보면 외로워질 때도 있다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지 고운 음성으로 대답해 주길 기다리며     

안갯속에 서있는 그 마음을 네가 알 리 없다     

언젠가 내게 가슴을 주리라고 너는 내게 약속을 한 적은 없다 나도 너에게 약속은 한 적 없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가슴에 자리 잡아버린 너를 이제 와서 내쫓을 용기도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안갯속에 서있는 기분이다     

언젠가 저 멀리서 손전등 하나 슬며시 비추며     

내 마음을 안내할 너는 오게 될까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안갯속 길을 천천히 운전해 가면서 따라 읊조려 본다. 짧은 시지만, 긴 산문 한편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너무 감성적인 탓일까.     


박해선 시인의 시다.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시인이다. 그 시인에 대해 상상해 본다. 조심스럽게 안갯속을 헤쳐 나가며. 박해선. 이름으로 봐선 여성스럽다. 그러나 뚝뚝 문장을 끊는 시의 흐름으로 봐서는 남성스럽기도 하고.     


시인은 말한다. 나의 시선(생각)이 나를 볼 수만 있다면 족하다. 자존감이다. 그러면 모든 걸 내려놓겠다. 그동안 얽히고설킨 그 모든 것들을. 그러고 새벽안갯 속을 걷는다. 새벽은 새로운 시작이다. 다만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는 게 흠이지만.     


같은 존재를 인간(본성이 강함?)과 사람(사회화가 된?)으로 표현하고자 한 시인의 의도가 궁금하다. 난 <세> 들어 산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란, 전세든 월세든 일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중얼중얼.     


                               (스스로에게 다그친다......... 제발, 그만하자......... )    


멈춘다. 차를 멈추고 생각을 멈춘다. 시를 분석하려는 못된 버릇이 또 발동한 것이다. 시를 감상하는 데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게 기본이다. 아니면 행간을 들려다 보고 숨겨진 의미를 음미하는 방법도 있다.     

시는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철학과 정서를 엿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밀한 감성적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기쁨은 시를 읽는 이의 온전한 몫이다.     


우리 삶의 일상 이야기가 나무 뒤에 숨은 것과 같다면, 시는 안갯속에 숨은 거와 같다. 나무 뒤에선 작은 소리 때문에 들키고 말지만, 안갯속에서는 짙은 산도 감출 수 있기에 역설적이지만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 읽기를 즐긴다. 출근길 시 한 줄 한 줄 꼭꼭 씹으면서 가슴에 담으며 생각을 잇는다. 산다는 것에 대해서, 고독에 대해서, 견뎌낼 수 있음에 대해서. 묘한 일이다. 안개를 만난 것은. 묘한 일이다. 시를 만난 것은.     

                                    <포항 인근 신창 앞바다 일출 무렵, 해무에 젖은 동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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