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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9. 2022

핸드폰 초기화 後

딜리트...

작년 겨울 나름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서 외식 중, 좌하 어금니 일부가 깨지는 일을 당했다. 식사 중에 돌을 씹은 건지, 원인은 모를 일이었다. 당시 심신이 피폐한 상태라 모든 게 귀찮아 식당 측과 옥신각신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 뒤 먹거리 앞에서 나도 모르게 꼭꼭 씹기를 피하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 고기보다는 국물 있는 음식을 선호하는 습관이 평소보다 더 잦아졌다.     


국물 있는 음식만 가까이하다 보니 어느 날부턴 밥 1/3 공기에, 이런저런 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가 밥상의 전부였다. 뜻하지 않은 후유증이었다. 회사 식당에서도 두세 숟가락 혼밥으로 시장 끼만 때운다. 그러나 이런 혼밥이 늘 외롭거나 나쁜 건만 아니다. 그 시간도 나름대로 의미를 주는 순간들이다. 나를 돌아보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늦은 밤 귀가 길에 애꿎은 황성공원 소나무에게 오른손 주먹으로 휘둘렀다가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밴드로 대충 감싸고 수영장을 들락거렸다.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상처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에게 혀 차임을 당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뼈까지 문제가 될 뻔했다면서. 그는 내가 미련한 곰과 친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때도 만사가 꼬였고 그것을 풀기엔 너무 지쳐서 대충 처리했다가 자초한 일이었다. 다친 손 때문에 수영장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의 1%로도 안 되는 상처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제약이 생긴 것이다. 수영도 수영이지만 매일 하는 샤워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퉁퉁 부었을 땐 젓가락질도 포클레인처럼 해야 했다. 그일 이후로 자학하지 않고 살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며칠 전부터 핸드폰이 속을 썩였다. 상단에 ∅ 표시가 떴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전화가 불통이었다. 전원을 껐다 켜면 되기도 해서, 나중에 수리를 맡길 생각에 불편한 대로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초기화> 버튼을 누르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 순간 아차 싶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가끔 노트북을 초기화하던 버릇 때문에 저질은 실수였다.     


잠시 후 폰을 확인해 보니 그동안 폰으로 찍은 모든 사진들과 지인들의 연락처가 다 사라졌다. 심지어 카톡 방마저 행방이 묘연했다. A/S센터를 찾아갔지만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는 핸드폰 대리점에 가서 카톡 방만이라도 살릴 방법을 물으니 개설 당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란다. 그리고 만일 카톡 방을 새로 개설할 욕심을 내면, 그 전 사람들과 영영 연결이 되지 않으니 각오하고 기억을 더듬으란다.     


꼬박 반나절 소동이 있었다.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쩌고저쩌고 해서 아이디를 기억해 내고 이리저리 해서 비밀 번호까지 겨우 알아내 지워진 카톡 방을 복구했다. 복구된 카톡 방은 초기화 직전 상태가 아니었다. 몇 년 전 상태였지만, 내겐 그거라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지인들의 폰번이 없어 상태 메시지에다가 폰번을 알려달라고 문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 가보니 잊고 살았던 혹은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카톡 한번 주고받지 않았던 사람의 수가 백 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내가 삭제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폰번을 알려 달라고 방금 올렸던 문자를 내렸다. 지인들을 귀찮게 할 생각이 없었다. 잊고 싶었든지, 싫었든지,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로 지운 이름들. 그때, 나도 누군가에게는 삭제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차단될 수도 있겠고.     


나는 딜리트(delete. 삭제)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필드에서 사진을 찍고 외장하드에 저장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진과 없는 사진을 구분할 때, 자주 쓰기 때문이다. 이 소동 후 사진 딜리트 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방은 정리해야 했다. 고인이 된 사람, 멀리 떠난 사람, 가까이하기에 벅찬 사람. 어떤 사람은 결국 삭제하지 못하고 남겨 두기도 했지만. 핸폰 초기화 사고로 뜻하지 않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가 부서지고, 손을 다치고, 핸폰 초기화 같은 상처를 당해봐야 그 뭔가를 겨우 깨닫는, 부재를 절감하는 나는 참 무지(無知)한 존재다.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름은 풍요로운 때이기도 하지만 부재가 시작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부재에도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포항 인근 지경 앞 일출이다. 이런 장면을 찍을 때마다 모든 시름을 잊는다. 또한 부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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