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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8. 2022

촌놈

재래시장 나들이

며칠 전 거실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다 <플(프)리 마켓>이라는 오래된 tv 코너 프로그램 제목이 궁금했다. 뭐지? 대충 내용을 보니 벼룩시장 같은 건데... 찾아보니 ‘flea’는, 벼룩을 의미하는 거였다. 쉬운 단어지만 평생 그 단어를 몇 번이나 읽고, 말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벼룩?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라 자료를 뒤적였다. 벼룩시장은 유럽 야시장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벼룩이 나올 만큼 오래되었거나 낡은 물건을 팔기 때문이다. 혹은 경찰의 단속을 피해 이리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게 마치 벼룩 같아서다. 또는 거래되는 소품가구들이 오래된 암 각색이라 벼룩의 색깔과 닮았기 때문이다. 등등


경주 벼룩시장 몇 군데를 가본 적이 있다. 봉황대 인근과 황성공원 실내 체육관 옆 등. 굳이 원하는 물건 때문이 아니라 궁금해서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이, 나름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반면 물건은 조악해 내 손길은 심드렁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언제 한번 같이 간 일행으로부터 경주를 상징하는 펜던트를 선물 받았는데, 그날 이후 나는 아직도 그 목걸이와 숨바꼭질 중이다.


지난주일 미사 후 병문안을 한 뒤 점심을 먹으러 병원 가까이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소머리 곰탕을 일행과 함께 먹기 위해 서다. 남들은 다들 편한 복장이었는데, 미사 때문에 정장을 한 나는 살짝 뻘쭘했다. 마침 간 날이 장날 이어선지 그 많은 곰탕집마다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낯선 이들과 어깨를 맞대고 먹는 자리가 불편했다. 자기네끼리 주고받는 시시콜콜한 말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동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스란히 들어야 해서 곤혹스러웠다. 심지어 바로 옆 사람이 양념장 전용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도,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재래시장 나들리라, 웬만하면 상관없는 척, 안 들리는 척, 못 본척하면서 뚝딱 한 그릇을 비웠다.


가끔 내가 이곳을 올 때가 있는 데 그땐 주로 새벽이다. 동료 사진작가들과 출사를 가기 전, 곰탕으로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날 식사를 마치고 시장 상가 사이를 스쳐 나오다가 발길이 멈췄다. 아... 후회가 삭풍처럼 밀려왔다. 새벽 시각 대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을 보고만 것이다.


‘칼국수 골목.’ 1970년 대 드라마 세트장 같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손님들은 바글바글했다. 이 골목을 알았다면 곰탕 대신 칼국수를 먹을 걸 ㅠ. 워낙 면 종류를 좋아하다 보니 경주에 많은 면 요리 집을 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재래시장 안에 있는 칼국수 집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거다. 정장에 초라한 칼국수 집... 그러면 어떤가? 조만간 한 번 와 보기로 하고, 기억을 폰으로 옮겨 담고서 돌아 서야 했다.


그리고 보니 나는 참 촌스럽다. 기웃거린다는 곳이 벼룩시장, 재래시장이니... 막내아들이 어릴 때 한말 마따 다나 ‘아빠는 폼이 안 난다.’ 어떻게 해야 폼이 나냐고 물으니, “일단 명품 브랜드로 머리부터 구두까지 싹 바꾸고, 차도 외제차로, 백화점 같은 데만 들락거리고, 전에 하던 골프도 치러 다녀야...” 웃음이 났다. 아들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들의 생각보다 더 촌스럽다는 것을.


나는 가끔 대구에 있는 서점에 가서 이 책 저책을 사 가지고 온다. 반월당 현대백화점 지하와 중부 교보생명 빌딩에 위치한 교보문고다. 그런데 사실 이곳에서 책을 구입하는 권수는 적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은 반월당에서 멀지 않은 YES24와 교보생명 바로 옆 건물 지하에 있는 알라딘이다. 두 곳의 교보문고는 내가 잠시 애용하는 주차장 정도?


신간을 위주로 파는 대형서점에서 대충 구매한 책은 나중에 읽다가 후회할 확률이 높다. 오자(誤字)만 해도 그렇다. 제1판 제1쇄의 책 오류가 심각한 수준 일 때도 간혹 있다. 출판사도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고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이미 검증된(?) 책들은 만족도가 높다. 가격도 착하고 무엇보다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는 도저히 구할 방법이 없기 때 이만한 곳도 없다.


전에 아들을 위해 사다 준 실용음악 책도 사실은 알라딘에서 산거다. 아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요 몇 개월 동안 그런 식으로 보석 같은 책몇 권을 건졌다. 참고로 말하는 데 중고 서적이라고 해서 낙서가 되어 있고 파손된 것이 아니다, 아마 전에 팔다가 재고로 남은 게 아닌가 싶다.


요즘 리포트를 쓸 일도, 시험 칠일도 없고 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고전음악을 듣는 데 할애하고 있다. 일단 가지고 있는 cd 한 세트(10장) 챙겼다. 브람스부터 로드리그까지, 수십 명의 작곡가와 1백 편이 넘는 음악들. 전에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어렴풋하고 애매한 곡들은 따로 챙겨 출퇴근길에 늘 듣곤 한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 등을 들으며 사색에 잠기다가도 아람 하차투리안의 <사브레 댄스>(칼의 춤)가 들릴 땐, 음악에 맞춰 엑셀을 춤추듯 밟곤 해 나도 가끔 놀라곤 한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과자 사브레와 이름이 같다. (이 과자를 45년 동안 먹고 있음) 과자만큼이나 곡이 달콤하다. 혹 안 좋은 일로 기분이 꿀꿀할 때 들어보기를 강추한다.


마림바로 연주한 곡도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태국계 영국인인 버네사 메이의 바이올린 연주로 들어 보기를. 유튜브에서 ‘버네사 메이의 샤브레 댄스’라고 치면 그녀의 퓨전 무대 연주를 볼 수 있다. 가끔 내 차를 동승하는 이들이 1~2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 따분하지 않냐, 다른 종류의 cd는 없냐고 투덜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기만 한다.


이제 이 나이쯤 되면 불혹, 지천명, 이순... 이 아니라 불시(不視)가 되는 듯하다. 불시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남의 시선에 크게 괘념치 않는다는 내가 만든 조어(造語)다. 얼마 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이 읽고 밑줄을 친 적이 있었다.


[살다가 만나는 위험은 우연한 현상일 뿐이다. 어떤 불행이 닥쳐도 정신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불행은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정신의 타락이다...]


정신 줄을 놓지 말라는 말이다. 살면서 내게 시나브로 다가서는 불편한 것들에(위험이든 뭐든) 대해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내 영역 밖의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촌스러운 곳이라도 어슬렁거리며 정신 줄을 꽉 붙들고 있는 거다. 절대 놓지 않는 거다.


                                <버네사 메이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는 접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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