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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5. 2022

운명인가? 숙명인가?

막거나 피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청송 백석탄 계곡> - 어지럽다


운명인가. 숙명인가. 혹은 실수...  운명과 숙명의 차이를 아는가? 운명은 우리 앞으로 날아오는 돌멩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걸 보고 막거나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랬던 거야?”  최근 요 몇 년 아니 몇 달 사이에 어떤 일들이 그에게 있었고, 그 끝은 놀라운 결과로 다가왔다.     


그 원인과 결과의 시차가 길었다면 그는 그 일의 인과(因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그 시차들이 짧았기에 그 <마무리>들이 그를 당황케 했다. 어떤 마무리들은 그에게 행운으로, 또 어떤 마무리들은 그에게 불운을 가져다주었다.     


행운으로 다가온 열매는 달콤했다. 스스로가 대견해하기도 했다. 그것들이 그에게 선물처럼 전해 온 것에 대해, 그는 보란 듯이 당연하고도 마땅한 것이라며 우쭐대고 건방을 떨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근 마지막 일이 그를 불편케 했다. 그날 그 결정을 내릴 때 그는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 그는 그 퍼즐이 잘못 껴졌음을 첨엔 알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은 이미 번복하기엔 너무 늦었고 그의 자존심마저도 눈 돌린 뒤였다. 그 이후 아린 맘은 몇 날 며칠 그에게 깊은 잠을 허락지 않았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가슴 구석에서, 그것은 불씨로 피워 올라 불꽃이 되어 가슴을 까맣게 태웠다.     

그럴 때마다 자학하듯 그는 하염없이 한 참을 걷거나, 뭔가를 외우거나, 소리쳐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에 몰두해 그 일을 잊고자 했다. 그런 땐 그 일이 잊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면 또 스멀스멀 그 일의 기억은 또 살아나 다시 그를 옥죄었다. 누구든 살아오면서 여러 실수를 한다. 그는 이번 일도 실수라도 여겼고 여러 날 동안 자책하고 반성하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 실수였을까?  그 기억이 고통으로부터 희석되어가고 있는 요즘, 그가 돌이켜 보니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그때 그리도 엉뚱했을까? 왜 그때 그는 거기에 있었던가?  그리고 왜 나는 평소처럼 예리하지 못했을까?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아니다, 그 일은 이미 예정된 결과의 시작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의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정된 곳으로 운명의 수레바퀴 굴러간 것이다)     


결국 따먹지 못한 포도에게 눈 홀기며 자리를 떠야 했던 여우처럼, 그는 인지부조화라는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인지부조화도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 있어야만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잊은 듯했다.     


무슨 일에 당면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의 실용성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또 목표하고 있는 바가 과연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일인지 항상 확인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실용성과 합리성의 결핍과 그것이 운명이든 숙명이든 그 돌멩이가 앞에서 날아왔든, 뒤에서 날아왔든 막거나 피하지 못하고 맞는 그는, 멍이 들었고 가을의 문턱에서 혹독한 맘고생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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