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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5. 2022

사귐과 다툼

삶도 찌찌고 볶아야 맛이 난다

                                            (첨성대 인근에서 만난 물 머금 핑크 뮬리)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서 좋다고 어려서부터 배웠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혹은 나이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마냥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때마다 챙겨야 할 일이 귀찮기만 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봄과 가을엔 참, 살맛이 난다고들 한다.          


이 좋은 계절에(봄과 가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배신이다 배신. 이땐 산이고 들이고 싸다니며 뒹굴고 놀아야 한다. 지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라. 이 봄의 초록이 얼마나 우릴 유혹하는지.     


그러나 나는 지난 5월 초, 주말 이런저런 일과 사람들과 엉켜 있느라, 아무 곳으로도 나들이를 가지 못했다. 술과 친해 있었고 성당 일을 몇 가지 하느라 분주했으며,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쓸데없이 손때만 묻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오후엔 홀로 항산 산 강변을 달렸다. 한 6Km 정신없이 뛰었나.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난리가 났고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그 순간이 지나면서 오는 또 다른 자극.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현상이다. 얼마 가지 않아 팔과 다리가 가벼워지고 주위의 모든 것이 선명해지면서 나는 유영(遊泳)을 한다. 의학적으로 베타 엔도르핀이 평상시 보다 5배 이상 증가하기 때문에, 뇌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창조력과 자신감이 배가 된다나 어쨌다나... 피곤을 잠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잠으로만 사실 늘 좋은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적당하게 움직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은 것 같다.          


한때 시 건방을 떨 던 젊은 시절.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에 관심을 갖고 무교회주의에 기웃거리던 때가 있었다. 나는 교회에서의 교우들과의 사귐에 소홀했고 다툼에 대해선 진저리를 쳤다. 그때 나는, 구원 문제를 교회나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기도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의문을 갖기도 했다. 내가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고, 내 이웃에게 진정한 봉사를 하고, 암자 같은 곳에라도 들어가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도 하면? 지금 생각하면 한 없이 부끄럽지만, 당시 내 신앙의 돌파구는 그것뿐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잠으로만 피곤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오늘 나의 신앙관은 신앙도 교회 안에서 적당히 지지고 볶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나는 성당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 사귀고, 다툰다.(?) 형님이라고 부르고, 듣기를 좋아한다. -고백하지만 내 삶에 있어 이 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서툴다-      


살아온 환경도 서로 같지 않고, 가지각색 직업도 다 다르고, 금전적인 여유의 차이도 있고, 대부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성당 일에, 특히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힘든 일을 말없이 하는 이들을 옆에서 보고 있을 때.      


<봉사>를 <기도>처럼 열심히 하는 이들을 보고 형님이라 부르고, 또 그런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껄껄되는 그 이상의 즐거움이 또 있을까. 그러나 간혹 경우가 아닌 일이 벌어지면, 나는 흥분하기도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 만사형통이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준다.     


역설적이지만 이 사귐과 다툼 중에서, 나는 요즘 베타 엔도르핀이 솟는 느낌을 갖는다. 이 상반된 분위기에서 만족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이 지지고 볶이는 상황에서, 이 애증(愛憎)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는 시구를 처음 접하고, 그 간결한 표현에 놀라 한참을 당황했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다들 초록을 단지 초록으로 보고 단풍을 그냥 단풍으로 보고 있는데, 그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가을 예쁜 단풍은, 사실 봄부터 초록이 쌓이고 쌓이다 때가 되어 낳은 결과물인 것이다’라고. 이 봄날의 초록에 사귐과 다툼의 애증이 쌓이고 베타 엔도르핀이 버무려지면서 묵묵히 견디다 보면 그날, 반드시 나는 예쁜 단풍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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