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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6. 2022

테너들의 길

날씨 따라 달라지는 출근길

경주 동천동 집에서 동남쪽인 내남에 회사 본부가 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어떤 길로 갈까 망설인다. 날씨도 살핀다. 맑은지, 흐린 지, 안개가 꼈는지, 비가 오는지. 출근길에 따라 CD나 USB 중에서 음악을 선곡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은 크게 3가지다. 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오릉 4거리(죽을 死라서 안 쓴다고 함) 아니 네거리에서 좌회전 후, 포석로 - 삼릉을 지나는 길. 나는 이 출근길을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길>이라고 부른다.               


오릉에서 직진 후 나정교를 건너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은 반구대로(자동차 전용도)를 타고 가는 길. 나는 이 길을 <플라시도 도밍고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형성 강변로를 타고 가다가 서천교를 건너 좌회전 대경로를 진입해 LPG 충전소를 끼고돌아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해서, 내남길을 따라 삼성 생활 예술고 앞으로 가는 길. 나는 이 길을 <호세 카레라스의 길>이라고 말한다.     

성악가에 대해 어설픈 내가 아는 유일한 세계 3대 테너들. 파바로티(1935년생 2007년 별세/ 지금 생존해 있다면 87세), 도밍고(1941년생/ 77세), 카레라스(1946년생 / 71세)를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만나는 나는, 그래도 나름 행복한 아침을 여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음악적으로 조예가 깊지 않아, 이 세 사람에 대해 편애하고 나머지 외국 성악가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래도 테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때 성가대 등에서 테너 파트에 속했고, 성악하는 동기들이 대학에서 교수(테너)로 있다 보니 그냥 그렇게 스스로 가깝게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군 생활할 때는 술 한 잔 마시면 <그리운 금강산>등의 노래들을 테너 엄정행처럼 흉내 내다가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고 갔던 트라우마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ㅎ. 테너 박인수의 공연장에 몇 번 들락거린 이유도 아마 그런 연장선 상위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파바로티의 길은 개인적으로 제일 선호하는 길이다. 포석로로 진입하면 우측에 그의 가슴만큼이나 넓은 논과 저 멀리 보이는 이름 모르는 산이 보인다. 그 산이 구름을 껴안고 있거나 안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땐, 가슴속 깊이 뭔가가 꿈틀거린다.               


게다가 그 길 위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를 듣게 되는 날에는 운전하는 손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가사야 번역된 것을 대충 보았기에 전체 흐름은 알고 있지만, 그가 불러주는 그 아리아는 서정적이면서 슬픈 단조 멜로디로 가슴을 아리게 한다.               


웬만한 사람이 다 파바로티를 아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지나다니는 길이다. -송창식이 세시봉 데뷔 때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지 아마?- 그렇게 삼릉 숲을 지나고 미역곡길로 접어들어 왜가리 서식지 대나무 숲에 지나다가 만나는 고개 숙이고 있는 왜가리 한, 두 마리. 그 많던 왜가리들은 다 어디로 가고. ㅠ. 아마 그 왜가리도 외로움에 지쳤을지 모른다. 그래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아닐까?     


파바로티 길보다 한 5분 정도 출근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도밍고의 길.  부유한 집안에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게다가 충분한 교육을 받은 도밍고는 10대 시절부터 유명한 극장에 초대되어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거기에 준수한 용모, 카리스마와 개성 넘치는 연기력으로 관중을 움직이는 이 시대 단연 최고, 현존하는 20세기 마지막 테너라고 불리는 도밍고.               


잘 다듬어진 반구대로가 그의 일생과 닮았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어쨌든 그 길을 달릴 때마다, 듣는 도밍고의 <무정한 마음>은, 시원한 도로와는 달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한다.               


[카타리, 카타리... 그대는 왜 내게 말하는가.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던지는가. 그대에게 내 마음을 바친 것을 잊었는가. 카타리... 잊지 말아요. 카타리... 카타리... 그대는 왜 함부로 말하는가. 내 마음 아픔을 생각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고. 무정한 마음. 내 생명 다 빼앗아 갔네. 모든 것은 끝나고. 지나간 옛 꿈을 다 잊기 원하네...]     


출근길이 가장 긴 카레라스의 길. 도밍고의 길보다 10~15분가량 더 걸린다. 파바로티와 도밍고라는 이 막강한 성악가들 사이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살아남았던 그의 존재감과 그리고 지독한 병마와 싸워 이겨낸 카레라스.               


길도 그렇다. 앞서 말한 두길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경주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그 길은 정말 시골길이다. 저수지 몇 개를 지나치면서 논길로 출근할 때 듣는 그의 노래는, 목소리는, 길만큼이나 미성(美聲) 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매 순간 애잔하고 가슴이 뜨겁게 느껴진다.               


영혼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로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마라)-무명의 '폴 포츠'가 불러서 더 유명해진 노래>나 <그라나다 - 스페인의 도시명>을 듣노라면 왜 그를 사람들이 은빛 테너라 부르는지 알게 한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엔 조금 일찍 출근길에 나선다. 그리고 무조건 카레라스의 길로 출근한다. 창밖에 비 오고, 탁 트인 전방은 빗물을 머금은 벼들이 초록빛 스카프를 흔들어 대는데, 차 안에선 도밍고가 곁에 앉아 말을 건네고 있는, 고독한 그 길로.     

                                 <좌에서부터 도밍고, 카레라스, 파바로티 -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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