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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4. 2022

훔쳐본 일기장

그러나 낯설지만은 않은...

어제 서재의 어수선한 책장을 정리하다가 낡은 다이어리를 보고 흠칫했다. 아주 낯설지만은 않다. 21세기를 여는 200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년필로 쓴 일기장이다.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2000년 1월 29일 토요일 


또 힘겹게 하루를 연다.

오늘도 입안에 말이 적고마음에 일이 적고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아이와 아내에게 산책을 가자며 숙소에서 나와눈 덮인 황량한 들판을 더듬었다어디로 갈까 머뭇거리다 문득 오던 길을 뒤 돌아보니오버랩되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한 대목.


나는

도망가야 하는 가.

삼포로 가야 하는 가.

(그런데 지금 내겐삼포는 어떤 의미인가어딘가?)


포말처럼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지금 내 손등에 떨어지는 것이 눈이 아니라 메밀꽃이라는 것을 안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래 이효석의 생가가 있는 봉평엘 가자.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효석의 생가 앞에서 시퍼렇던 시절 느꼈던 그 애련함은 없지만메밀꽃은 없지만흐붓한 달빛도 없지만허 생원이나 동이도 없지만...


(... 그리고 나는?... 나도 없지만...)


온통 눈으로 덮인 그의 흔적들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아내와 아이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숨이 막혀 몸서리치면서 노란 액체를 토하고 말았다반나절 정도의 육체적 피로도 감당해 낼 수 없는 이 껍데기... 아내와 아이의 눈에 맺힌 이슬을 모른 척하고 어금니를 앙 물고 몸을 추스르면서 일어나 혼자 중얼거려본다.


(구차한 이 육신... 차라리 자진해 벗어야 하는 게 아닌가가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보지만... 시간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다이렇게 내 막()을 내릴 것인가?)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홀로 앉아 짤막한 글하나 쓰고 잠들다.


밤이면 밤마다 기차를 따라다니는 달처럼차창으로 눈을 돌리면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눈 빛가슴 저미는 쓰라림에아련한 그리움에세월은 흘러가도여전히 젖은 시선으로무덤까지도 따라 올 그 눈 빛



P.S.     

낯익은 글씨체.     

2000년 1월 말, 이젠 기억도 희미하지만, 그 해 겨울 강원도 장평이라는 산골에서 칩거 아닌 칩거를 잠시 한 적이 있었다. 그핸 유독 많은 눈이 내려 세상은 온통 흰색이었다. 보름 정도 있으면서 낮에는 법정, 도울, 현각의 신간들을 뒤적이거나, 지금도 내게 늘 화두가 되고 있는 포이에르 바흐와 아라이 사사쿠의 구간들을 되새김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주일 저녁에는 근처 대화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복도 누렸다. 그땐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장수나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만이라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건강을 간구했다. 기억하실 거다. 어리어리했지만 간절했던 나의 작은 소망을. 그분께서는.     


요즘 계속되는 과음과 늦은 귀가에 걱정하는 식구들에게 미안한 맘 전한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오래전 내가 쓴 일기도 기억 못 하고 낯설어하는 구제불능.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없고 되찾은 건강에 치기 어린 호기를 부리고 있으니...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고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 적다’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본다.     

<시간을 아끼자. 절제하자. 나로 인해 행복해할 모든 이의 선한 눈매를 기억하자>라고,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게 살도록 하자>라고도.    


 

                                                             이효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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