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를 소망한다
보통은 노래에 바이올린 또는 첼로의 조주(助奏)가 딸려 연주되지만, 나는 지금 클라라 주미 강이 바이올린을, 손열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2중주를 듣고 있다. 독일어권의 예술가곡 리트(Lied) 중에 하나인 <Morgen/내일>이라는 곡이다. 독일의 R.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거다.
[내일 태양이 다시 빛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 위에서/ 태양을 호흡하는 땅의 한가운데서/ 우리, 행복한 우리를,/ 내일은 다시 결합시켜 주리라/ 그리고 넓고 파도가 푸른 해안으로/ 우리는 조용히 천천히 내려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리라/ 그러면 우리 위에 조용한 행복의 침묵이 내려오리라...]
그런데 가사와는 달리 무대 위 바이올리니스트가 눈물을 참으며 연주하는 게, 나를 먹먹하게 했다. -혹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녀는 울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연주회는 2020년 9월 30일 서울 롯데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연주 실황을 녹화해 놓은 것이다. 2020년 가을은... 기억을 더듬어 본다.
2019년 초 겨울부터 꿈틀 되던 코로나라는 괴물이, 2020년엔 아시아 전역을 휘 젖고 다니던 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초유의 사태에, 그 문턱에 들어서면서 클라라 주미 강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나도 애써 눈 감고 뜨지 않았다.
오늘 또 백신을 접종했다. 벌써 몇 번째 인지, 그 수가 가물거린다. 주위에선 더 이상 맞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생각에 거부하지 않았다. 코로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매일 저녁때마다 만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힘들어질 수 있는 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지에서다.
백신을 맞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 나는 고전음악 감상 강의실에 앉아 있다. 일종의 나만의 백신 휠링일 수도 있다. 리트가 독일 가곡을 총칭한다면 칸초레(Canzone)는 이탈리아 가곡을, 샹송(Chanson)은 프랑스어로 부르는 세속적인 가곡을 통칭한다.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다. 우리도 1970년대엔 가곡의 전성기였다. 박인수, 엄정행, 신영조... 그러나 가요계에 오빠부대가 등장하면서 한국가곡은 쇠퇴기를 걷는다. 마치 ‘달도 차면 기우는 것처럼.’
하긴 [고향집 싸리울에 꽃 등불이] 타오르는 풍경이라느니 [산뜻한 초사를 달이 별 함께] 나타는 시어, [뒤뜰에 봉선화 곱게곱게 필적]의 느리고 단순한 가사의 가곡들을 요즘 신세대들이 1도 관심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오늘 나는 리트에 꽂혀 시인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쓴 연작 곡 <겨울나그네>의 24개 중 몇 개를 골라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들은 결코 제목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채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처절한 겨울’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 읊은 셜리의 시를 기억하며 슈베르트 옆을 지켰다.
그러다 춘망사(春望詞)가 떠올랐다. [꽃잎은 날마다 바람에 지는데 -경주도 지금 이곳저곳에서 낙화가 한창이다- 만날 날은 아득하기만 해요...]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가 쓴 시다. 그 시에 김소월의 스승 김억이 번안하고 김성태가 1945년에 곡을 붙인 가곡이 <동심초>다. 이럴 걸 기억하고 있는 나는, 확실히 뼛속까지 신세대가 아닌 쉰세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설도의 시 제목처럼 지긋지긋한 이 코로나의 ‘봄을 잊고(春望이 아닌 春忘) 싶을 뿐이다.’
이젠 (2022.05.02부터) 야외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코로나로부터 퍼펙트하게 자유로워졌기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본 듯해 그나마 다행이다. 몇 해 동안 우리 주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장미의 계절 5월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해는 뜰 것이며, 달도 차면 기우는 건 진리다.
셜리가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았다고 노래했듯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봄도 춘망(忘) 사처럼, 코로나니 백신이니 하는 단어들도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기를. 그리고 오늘 백신이 내 생애 마지막 코로나 백신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