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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2. 2022

맨발 황톳길, 5 덕

경주 황성공원 황톳길 이야기

새벽마다 내가 사는 경주, 황성공원 숲길을 걷는 게 오래된 습관이다. 얼추 계산해 보니 걷는 거리는 여섯 바퀴 6km 정도고 시간은 1시간 20여분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요즘은 황톳길을 약 20여 바퀴 걷고 있다. 지난해 내 생일 다음날 오픈된 길이다. 그때 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경주 시에서 내게 제대로 된 선물을 했군) 맞다, 착각은 자유다. 나는 이러고 산다.         


황톳길은 3백 m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곳곳에 나무 벤치나 신발장, 지압 돌판 등 세심한 배려가 이용자들을 미소 짓게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걷기를 마치고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물. 물로 발을 씻고 준비되어 있는 휴지로 물기를 닦고 에어건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얼마 전부터는 휴지를 비치하지 않는다. 손수건 아니 발수건을 준비해 가면 좋다-         


맨발로 걸으면 말초신경을 자극해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면역기능이 강화된다고 한다. 소화기능에도 좋은 효과를 보이고 비만도 예방되면 뇌 건강에도... 하여간 다 좋단다.          


그러나 나는 3가지 덕을 보고 있다. 첫째는 지구력이 늘었다는 느낌? 두 번째는 몇 개월 째 사라지지 않고 있는 왼쪽 어깨 통증이 호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튜브를 통해 철학, 역사, 문화 등에 관한 방송을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땐 반드시 이어폰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민폐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더 덕 보는 게 있다. -네 번째 덕이다- 그건 이번 학기 들어 헬라어(희랍어, 그리스어) 공부의 필요성이 있어 그 공부를 황톳길 걸을 때 한다는 것이다. 희랍어 알파벳은 총 24자로 되어 있는 데, 영어처럼 발음 기호가 존재하지 않아,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그 단어를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에 희랍어 알파벳 [α β γ δ...] (알파 감마 베타 델타...)라고 붙여 불으며 박자가 딱 맞아떨어진다. 신기한 일이지만 황톳길에서 암기 효과가 좋다. 어제오늘은 시 한 편을 외웠다.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다. 이 시는 짧지도 않을뿐더러 몇몇 용어는 현대적 표현이 아니라 외우기가 녹녹지 않지만, 하여튼 다 외웠다.          


시를 왜 외우고 낭송하기를 즐기느냐고 누가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치매 예방? 그건 아니다. 굳이 몇 해 전 기억을 뒤적여 보면, 어느 모임에서 내 생일임을 안 지인이 즉석에서 선물로 시 한 편을 읽어 주던, 아스라한 기억 하나 때문일까.          


나의 황톳길 사랑은 좀 극성이다. 맑은 날을 기본이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걷는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추위에 하도 발이 시려, 때 늦은(이른) 특수 양말도 하나 구해 났다. 일명 양말 황톳길이다.     


상상하나. 어느 인적이 드문 새벽 황톳길.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데 시커먼 우산 들고 까만 마스크를 한 ‘내’가 혼자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또는 청마의 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를 읊조리며 걷고 있다면,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그 이상한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랄지를.          


그래서 뭐를 외우며 걸을 때 가끔 뒤를 돌아다본다. -황톳길은 일방통행이다- 놀랄지 모를 사람에 대한 배려다. 이렇게 새벽을 열며 나는 멋진 늦봄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퍼펙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황토 길에도 불편함이 있다.          


역 방향으로 걷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신발을 싣고 걷는다거나, 개를 데리고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황톳길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언젠가 하도 짜증이 나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시정을 요구했고 그럴 때마다 -다는 아니었지만- 정리가 되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 같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나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르르 떼 지어 황톳길을 걸으며 크게 떠드는 사람들이다. 그들로 인해 뒤 따르는 다른 사람들이 제 속도로 걷지 못하고 떠드는 이들의 최근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다 들어야 한다. 이건 방법이 없다. ''시끄러우니깐 조용히 좀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참아야 한다, 아니 참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이어폰을 끼고 (비타 콘템플라티바... 비타 콘템플라티바... 비타 콘템플라티바)라고 중얼거린다. 이게 맨발 황토길을 걸으며 찾는 다섯 번째 덕이다.                    


         < 우중에 걷고 나니 비참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바로 옆에 설치된 수돗가에서 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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