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수영을 마치거나, 출근 후 회의할 때 등 적당히 마시던 커피를, 그날 낮에 무리했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산 <콘트라베이스> 500ml를 생맥주처럼 마신 탓에, 깊은 잠을 못 이루고 깼다. 새벽 2시.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거실에서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영화 전문 채널에 시선이 꽂혔다.
NEXT <로마의 휴일>영화가 곧 시작된단다.
30여 년 전. 고교 1학년 까까머리 사내아이가 늦은 밤, TV 앞에 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면 방송되는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날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흑백영화 <로마의 휴일>이 방영 중이었다.
첫 부분
(가상) 왕국 공주로서 받아야 하는 제약과 쉴 틈 없는 스케줄에 싫증 나고 지친 앤 (오드리 헵번 扮). 국빈 자격으로 방문한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어느 날 밤거리로 몰래 뛰쳐나가 잠들었다가, 특종을 찾아다니던 기자 조 (그레고리 펙 扮)에게 우연히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다.
다음 날. 처음에는 몰랐지만 공주임을 알게 된 조는 특종 욕심에 앤과 함께 로마 거리를 활보하고, 친구까지 불러, 몰래카메라로 그녀를 찍게 한다.
중간 부분
짧은 뱅헤어의 헵번스타일이 탄생. 흰 와이셔츠에 긴 A라인 스커트의 조화. 스쿠터와 스카프, 젤라토 등의 소품들.
끝 부분
로마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다시 만난 앤과 조. 그 자리에서 그가 기자임을 알게 된 공주는 당황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정에 없던 기자들과의 악수 타임을 자청한다. 그때 조가 앤에게 로마 방문 기념이라며 봉투를 건넨다. 열어 보니 그와 함께 했던 로마 이곳저곳에서 몰래 찍힌 사진들이었다. 조가 이 사진을 신문에 공개했다면 특종 중의 특종인 사진들. 공주와 평민으로 만난, 이뤄질 수 없는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사랑 이야기. 결국 두 사람은 각자 다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영화가 끝나자 아쉬운 듯 긴 한숨을 쉬는 그 까까머리가 중얼거린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이 영화를 다섯 번이나 봤는데, 왜 질리지 않지. 나도 어른이 되면 기자나 될까)
영화는 후에 그 아이 직업에 큰 영향을 준다. 아이는 그 이후에도 로마의 휴일 설정과 유사한 <노팅힐>이나 <체이싱 리버티> 같은 영화를 보게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된 그에게 로마의 휴일은 그 어느 영화와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TV 영화 채널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웬 광고가 그다지도 많은지. 했던 광고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나 무료인 걸 감안하면 이 정도 참을성은 기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홈쇼핑 채널에서 낯익은 쇼 호스트 보게 되었다.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거... 여배우, 아니 이제는 방송인이라고 해야 될 최0라.
오래전 이야기 한토막. 한 때 대종상, 백상 예술대상 등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신승수 감독. 평소 알고 지내던 그가 김인문, 김희라 등과 같이 <수탉>이라는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 영화 홍보도 할 겸 인터뷰를 해달라며 연락이 왔다. 20여 년 전 이야기다. 신인인 주연 여배우 최0라도 언론에 최초 공개도 할 겸. 충무로 모 영화사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단발머리 앳된 뉴 페이스. 옆에 있던 신 감독이 그니(여성 대명사)를 추겨 세운다. 석사 출신이라느니, 부모님이 약사라느니, 그런데 무엇보다 신 감독을 감동시킨 것은 바로 며칠 전 첫 촬영장에서였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해당되는 바닷가 모래밭을, 나신으로 달리는 씬이었는 데, 신인치고는 너무 잘하더라는 것이다.
(참고-영화는 보통 TV 드라마처럼 쪽 대본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기승전결로 찍지 않음. 마지막 장면을 먼저 찍기도 하고, 중간에 찍기도 함. 편집 때 앞뒤 순서 조정)
최의 첫인상은 샤프했고 여배우다운 용모였다. 70년 대 장미희를 살짝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인터뷰 내내 조리 있게 답하는 말투도 인상적이었다. 배우로서 첫 인터뷰라고 밝힌 최는 살짝 긴장할 수도 있건만, 전혀 기죽지 않았다.
Q 하는 나보다, A 하는 배우가 더 말을 잘하다고 생각했는지, 동석한 신 감독이 묘한 헛기침을 해댔다. 어쨌거나 인터뷰를 끝내고 귀사 하는 길에 나는 속으로 예언했다.
(시나리오도, 감독도 괜찮고 여배도 나름... 충무로에 물건 하나 떴군. 요즘 핫한 이미숙, 이보희, 원미경, 최0라. 나쁘지 않은 조합이야.)
그러나 예언은 맞기도 했지만, 틀렸다. 영화 수탉은 몬트리올 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여 주인공 최는 영화배우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후에 라디오 진행자로 더 잘 나갔고 명성을 떨치긴 했지만.
아주아주 오랜만에 오드리 헵번을 만날 수 있다고 설레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 최0라. 세월 앞에서 동네 아주머니 같이 포근하게(?) 변한 최. 여전히 말은 천상 유수. 그는 내가 그니가 만난 첫 남자(기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지만, 그니는 기억이나 할까?라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영화가 시작되었다. 소반엔 냉장고에서 막 꺼내 온 캔 맥주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 이 영화를 보면 여섯 번짼가? 설렌다. 입술이 바짝 마르기도 했다. 캔 맥주를 숨도 안 쉬고 들이켰다.짠~ 그런데 이상하다. 뭐야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젠장, ㅠㅠㅠ
영화 인트로(Intro). 제목은 <로마의 휴일>. 그런데 출연진 명단이 자막으로 뜨는데, 임창정, 공형진. 정상훈... 헐... 아, 다시는 낮술 아니, 낮 커피를 과하게 마시지 않을 거다. 마시면 성을 간다 성을! 특히 양도 많고 맛있지만 콘트라베이스는 절대 안 마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