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게 될까?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대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어떤 문이든 그것이 대문이든, 창문이든, 금고든... 우리가 그 문을 열고자 할 때 최첨단 방식인 홍채, 지문부터 디지털 번호, 키 등을 사용하지만, 경첩이나 빗장으로 푸는 단순한 방법도 있다.
이것들 중 빗장은 문과 벽, 또는 양 쪽 문에 고리를 구멍이 평행하게 위치하도록 고정시키고, 그 사이에 단단한 막대기를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그 막대기를 옆으로 밀기만 하면 아무리 큰 문이라도 열린다. 잠긴 문을 여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삶의 빗장은, 쉽게 열리지 않을 때가 많다. 세상을 살다 보니 많은 문이 닫혔고 열리기도 했지만 아직도 열리지 않는 문들이 있다. 이 문의 공통점은 내가 잠그지 않았고, 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문은 오직 상대방만이 열 수 있다는 현실에 아픔이 깊다.
최근 오랜 시간 동안 굳게 닫혀있어 열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던, 문 하나가 어느 날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제는 낯선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이들. 그들로 인해 과거의 추억들이 눈덩이처럼 내게 다가왔다. 왜곡되고 굴절된 기억도 함께. 헤아려 보니 30년이 지난 인연이었다.
차가운 얼음 밑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밑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헤어질 인연은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도 엇갈릴 수밖에 없지만, 만날 인연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낯선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운명도.
그들이 말한다. 그 옛날에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숫자 몇 개로 똑똑똑 문을 두들기고, 열리길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 그러던 어느 날 그 문에 빗장을 자신들이 열 수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이제야 열었다고.
하고픈 말이 많다고 했다. 이렇게 빗장만 열면 되는데, 멀고 먼 길 걸어 돌아온 것만 같아 억울하다고.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좋다고 했다.
그들이 내게 지금 행복하게 잘 사는지 물었다. 그들의 이런 궁금증에 어렴풋이 그 옛날에 <원하는 걸 갖는 게(Getting) 행복>이라고 대답한 기억이 떠올랐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비슷한 물음에 지그시 눈을 감고 <원하는 곳에 있는 게(Being) 행복>이라고 답했다.
원하는 곳에 이렇게 살아 있으니,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아 다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들이 던진 질문이, 내 생각과 기억의 울타리를 확장시켰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와인 같은 영화 <러브 어페어>(워렌 비티 & 아네트 비티)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거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는 <라라 랜드>(라이언 고슬링 & 엠마 스톤) 까지도.
긴팔 흰 와이셔츠 차림의 나는, 모레아 섬 길을 걷고 있었고, 그리피스 공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워렌인지 라이언인지 나인지...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쌓인 성이다. 그것이 슬픈 인연이라면 모래성 같이 위태로울 것이고, 기쁜 인연이라면 바윗 성처럼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빗장은 굳게 닫혔고 그 앞에 배롱나무가 핏빛 향을 더하고 있다. 마치 지난여름 종오정 일원 그때처럼.
어디선가 읽었던 글 <시절 인연>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소유물과의 만남도, 깨달음과의 만남도, 유형무형의 일체의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 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천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있고, 아무리 만나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밖에 없다.
모든 마주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인연의 흐름을 거스르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다.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아직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을 뿐 만나야 할 일도 만나야 할 깨달음 도인 연이 성숙되면 만나게 된다. 시절 인연이 되어 만남을 이룰 때 그때 더 성숙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다만 자신을 가꾸라.
사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인연은 내 밖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만남은 내 안의 나와의 마주침이다.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도 그 사람과의 만남은 내 안의 바로 그 싫은 부분을 만나는 것이며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도 내 안의 이기의 일부분이 상대로써 투영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기에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을 것이 없다. 그것은 내 안의 놓치고 있던 나를 만나는 숭고한 '나를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삶의 성숙과 진화를 가져온다. 다만 그 만남에 담긴 의미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는 인연일 뿐이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있고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 모든 만남은 영적인 성숙의 과정이요. 나아가 내 안의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직 존재의 본질에 어두워 만남 속에 담긴 의미를 찾지 못할지라도 그 만남을 온 존재로서 소중히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래서 내 내면이 성숙하면 만남도 성숙하지만 내 내면이 미숙하면 만남도 미숙할 수밖에 없다. 미숙한 사람에게 만남은 울림이 없고 향기가 없다.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