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구티 수염을 자르다
보통 사람들은 사진작가들이 모든 피사체 앞에서 닥치는(?)로 카메라를 들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주위에 있는 작가들은 풍경, 인물, 야경, 접사, 동물, 흑백 등 수 십 가지 종류의 사진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찍는다. 심지어는 디테일하게 구름이나 바위나 이름 낯선 야생화만 찍는 이도 있다.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와서 그런지, 스토리 있는 사진 찍기를 즐긴다. 첫 공모전에서 입상한 것도 그랬고 신라 미술대전 사진 분야에서 몇 차례 입상, 입선한 것들도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는 것들이었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나 양팔 없이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한 비장한 의지의 선수, 비 개인 후 통도사의 두 스님 행보, 황금벌판을 자전거로 달리는 연인 등등
이런 사진을 찍다 보면 어떤 프레임으로 어디에 방점(傍點)을 둘 것인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고민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그 밋밋함에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얼굴에 방점 찍기? 그래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남자 수염 스타일이 30여 종이 넘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일명 <프리 구티> 타입 수염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매일 수염을 관리하느냐?라고 주위의 적지 않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작가답게 꽤 잘 어울린다 라는 말도 들었지만, 게을러 보이고 어색하니 기르지 말라는 충고의 소리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쯤 업무 차 만난 모 증권회사 지점장과 첫 대면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얼굴을 보고 껄껄대고 웃었다. 그도 <프리 구티> 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선 자기만 이 스타일을 선호하는 줄 알았다나 어쨌다나)
요 며칠 동안 일이 많았다. 논문 세미나 준비와 집안 일과 그리고 가을에 예정되어 있는 서너 군데 사진 전시회 준비등으로...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하지만 곧 연말이 다가온 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런데 어제 맘이 심란했다.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보던 책들을 뒤적여 보고 이런저런 상념에 술도 여러 잔 마셨지만 도통 집중할 수 없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이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서툼>이 갑갑함과 허전함과 극도의 스트레스를 여진으로 남겼다. 그때 삶의 방점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뭐로?
거울 앞에 섰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수년 동안 길러 오던 수염을 깎아버렸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게 있겠느냐마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 쉬기도 어려울 듯했다. 애꿎은 턱수염은 그렇게 잘려 나갔다.
오늘 새벽.
거울에 비친 이는 어제의 나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턱수염이 사라진 것뿐. 여름이라 새벽바람이라고 해도 습하고 여전히 명치 끝을 파고드는 상심의 강은 깊고... 아직은 풍성하다고 하지만 곧 다가 올 가을이 하루하루 더 초록을 지치게 함을, 내 야윈 얼굴에서 엿본다.
새벽바람을 가르며 집을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제발 살면서 찌질 하게 굴지 말자. 찌질 하게 굴지 말자. 찌질 하게 굴지 말자. 앓고 있는 모든 미련에서... 설사 그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경주 분황사 앞 모전석탑 인근에 핀 메밀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