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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10. 2022

질질 끌려갈 수는 없다

한 여름이지만 이제 곧 가을

‘기억과 추억’은 한 글자 차이다. 그렇지만 의미는 정 반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다르다. 혹자는 기억은 혼자만이 간직하는 것이고, 추억은 둘 이상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또는 기억은 언제든 그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가능성을 믿는 거고, 추억은 그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추억이라는 말에는 단 한 번 뿐이라는 의미와 마지막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번 휴가에 한 가지 <추억>이, 어떤 계기로 인해 그에게 소환되었다.


그는 올여름 휴가를 집에서 보냈다. 멀리 있는 아이들이 내려오지 않았기에, 집 근처에서 어정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그중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를 해치웠다. 그게 인근 ‘황성공원 숲 해설’에 참석해 보는 것이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 해설자가 가이쯔가 향나무, 리기다소나무, 박수무당 나무(팽나무) 등을 설명하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첫사랑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그러면서 “첫사랑의 맛을 아나요?” 이 느닷없는 질문에 순간 그는 당황했다. (글쎄?)


해설자는 낯선 꽃잎을 따 그에게 건네며 씹어 보라고 했다. 엉겁결에 그 잎을 입에 넣고 보니 달콤하듯 하다가 쓰디쓴 맛이 낫다. 해설자가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이 꽃은 순우리말로 수수꽃다리라고 해요. 흔히 라일락꽃이라고 하지요. 꽃말은 ‘첫사랑’ 혹은 ‘젊은 날의 추억’이랍니다. 첫사랑, 혹은 젊은 날의 추억처럼 세월이 지나고 나면 ‘쓰디쓴 맛’이 나기 때문이지요.”


그 라일락 잎이 계기가 되어 며칠 뒤 우연히 TV에서 우리 가요사에서 가객이라고 불리는 송창식의 노래와 엉키면서(?) 추억이 그에게 돼 짚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송의 노래를 듣던 중 그의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그가 평생 들어왔던 송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창식도 늙어 가는구나) 나중에 그 이유를 들어보니 얼마 전 성대 수술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올해 그의 나이가? 세월이 유수가 아니라 빛 같다는 생각에 그의 먹먹했다.


프로를 다 보지 않고 돌아 서 앉아, 홀로 소주를 마시며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 둘 안주 삼아 끄집어냈다. 어떤 이들에겐 나훈아가 또 어떤 세대에게 BTS가 로망이라면, 그의 세대 사내들에겐 송창식이다. 물론 이 말에 동의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싱어송라이터 송은 평생 주옥같은 노래를 만들었고 불렀다. 그는 송의 노래들 중에서 싫어하는 것이 거의 없다. 특히 미당 서정주 시에 곡을 붙인 <푸르른 날>, <선운사>도 좋지만 최인호가 글 써준 <밤눈>은 요즘 그의 십팔번이다.(이 전에는 <상아의 노래>였다. 코로나19전 노래방에라도 가게 되면 그는 이 노래만 불러, 일행들을 집단으로 감기에 걸리게 했다)


30여 년 전, 그가 문화부에 근무하던 시절, 송창식을 취재하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쉽게 닿지 않았다. 주거지는 경기도 퇴촌이라는 데 전화가 없어 연락 불가라 하고,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저녁마다 노랠 부른다고 하는 데 접촉하기에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송창식이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정보(이문세 결혼 축가)를 입수하고 압구정동 광림교회에서 송을 만났고 며칠 뒤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날이 되어 취재에 들어가기 전, 그가 던진 여담을 듣다 말고 특유의 껄껄 웃음으로 영동호텔 커피숍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송창식. 여담은 이랬다. [대학시절 아는 형과 그의 친구이며 후배인 당시 인기 절정의 <한마음/강영철과 양하영>을 만나 함께 맥주를 마시던 중 ‘어떤 가수를 좋아하느냐?’는 양하영의 질문에 그가 눈치는 1도 없이 송창식이라고 하는 바람에 분위기 박살 나고 강영철을 참 어색하게 만들었...] 그의 여담에 웃던 송창식이 “빈말이라도 <한마음>이라고 했어야지, 그 당시는 그들이 탑 중에 하나였는데”라며, 그래도 그의 여담이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던 송창식. 그 가객이 지금 일흔 하고도 중반을 넘어 여든을 바라보고 있고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들자, 그의 입맛이 마치 공원에서 라일락 잎을 씹었던 것처럼 썼다.


‘아이는 희망을 먹고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그는 아직 노인이 아니기 때문에 추억을 먹고살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아니 설사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노인이 되어도 절대 추억은 안 먹을 거다. 그렇다고 세월이라는 것이 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무더운 날에 이런 영양가 없는 ‘앙탈’을 스스로에게 부려본다.


올 가을이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은 국화처럼 꽃을 필 것이고 어떤 것은 낙엽처럼 질 거다. 피는 것은 달콤할는지 모르지만, 떨어지는 것을 분명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떨어지는 것은 그의 영역 밖의 일이거늘. 그는 로마의 철학자였던 세네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운명은, 순순히 응하는 자에게는 길을 안내하지만, 저항하는 자는 질질 끌고 간다.”라는. 맞다. 이게 인생이다. 라일락 잎에... 소주에... 추억에... 나이 들어 감에... 참 쓰디쓰다고 해도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질질 끌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경기도 미사리에 있는 가객이 운영하는 카페, 우연이겠지만 양하영이 고정 출연을 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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