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병이 깊다
황성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5시 30분 경이다. 어제는 새벽부터 종일토록 비가 내려 공원엘 나오지 못했다. 오늘은 맑다. 하지만 그제와 달리 날은 좀 더 어둡고 서늘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모기 한 마리가 앵하고 달려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잔영 실내 등에 비친 모기의 입이 삐뚤어져 보인다. 착시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는 처서(處暑)다. 그래서 모기 입이...
저 멀리에 있는 먼지 제거 에어 건의 모터가 털털털 소리를 내고 있다. 어두워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는다. 평소보다 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이유는 처서의 서늘한 바람 때문인가. 가까이 가보니 벌써 운동을 끝내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먼지를 털고 있다. 그래서 털털털거렸나 보다. 이 아재 개그에 혼자 피식하고 웃는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는 데 살짝 날이 밝아지고 있다. 평소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걷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몇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네들이 평상시와는 달리 실루엣으로 보인다. 걷기 시작한다. 숲 속에서 귀뚜라미들의 떼창을 하고 있다. 어쩌면 며칠 전에도 그 소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설마 하니 오늘이 처서라고 귀뚜라미들이 이렇게 요란을 떨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떼창을 인식한 것은 지금이다.
산책로를 반 바퀴 도는 데 어디선가 숨소리가 깊고 요란하다. 잠시 멈춰 귀 기울여 본다. 깊은 숨소리는 소나무에서 나는 거다. 어제 내린 많은 비를 두껍고 투박한 껍질로 머금은 흑송들. 그 나무가 그 빗물을 온몸으로 담아내기 위해, 짙은 진갈색 껍질을 폐처럼 움찔 거리며 내는 소리다. 그 나무들 밑에 머리 조아린 맥문동들도 그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듯하다.
몇 바퀴를 아무 생각 없이 돈다. 시쳇말로 멍 때리며 걷는다.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그러나 도무지 이어지질 않고 엉킨다. 갑갑한 마음이 가슴을 짓누른다. 고개를 흔들면 잡념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해 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자, 입에서 끙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찰칵... 다가오는 가을의 문턱에서 깊이 고개 숙이는 맥문동을 찍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삼각대 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열정이다. 대부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다. 순간 나도 카메라로 이 깊고 요란한 소리들을 담아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실상이 아닌 소리를... 하지만 주말로 미루고 돌던 길을 계속 이어 걷는다.
며칠 전만 해도 맨발 족이 꽤 되었는데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딱 한 사람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발과 땅이 부딪치는 소리와 끌리는 소리로, 마찰음으로 길이 평소 새벽길 같지 않다. 그 소리는 마지막 남은 어둠을 지우고 적막을 찢는다. 불협화음이다,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소리들이다.
걷기를 멈추고 긴 호흡을 내뱉고 있는데 나무 가지 사이로 까치가 운다. 왜 우리는 그것을 운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운다고 하지 말자, 나는 요란한 외침이라고 말하련다. 올려다보지만 새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 까치는 손님을 알리는 것이라는데, 오늘날 찾아 올 손님은 누구일까?
차로 돌아와 준비해 온 커피를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온 몸에 담는다. 처서 아침에 만난 소리들. 탈탈탈 모터 소리... 귀뚜라미들의 떼창... 소나무와 맥문동의 숨소리... 나의 신음... 맥문동이 찍히는 소리... 불편한 발자국 소리... 까치의 외침... 그리고 내 갈증이 젖는 소리.
문득 10여 년 전 처서 날, 쓴 시를 핸드폰으로 찾아 소리 내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묻다/ 바람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초복 전 날, 먼 땅에 있는 이에게/ 내 가난한 안부를/ 긴 한숨에 묻어 보냈고/ 한 여름 내내 답은 없었다...>
(답은 없었다. 작은 소리마저도...) 그렇게 나는 처서와 함께 온 소리들과 조우한다.
<10여 년 전 처서 때나 지금이나 어찌 이다지도 여전히 피폐한 지... 병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