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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24. 2022

처서, 소리로 다가오다

여전히 병이 깊다

황성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5시 30분 경이다. 어제는 새벽부터 종일토록 비가 내려 공원엘 나오지 못했다. 오늘은 맑다. 하지만 그제와 달리 날은 좀 더 어둡고 서늘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모기 한 마리가 앵하고 달려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잔영 실내 등에 비친 모기의 입이 삐뚤어져 보인다. 착시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는 처서(處暑)다. 그래서 모기 입이...


저 멀리에 있는 먼지 제거 에어 건의 모터가 털털털 소리를 내고 있다.  어두워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는다. 평소보다 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이유는 처서의 서늘한 바람 때문인가. 가까이 가보니 벌써 운동을 끝내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먼지를 털고 있다. 그래서 털털털거렸나 보다. 이 아재 개그에 혼자 피식하고 웃는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는 데 살짝 날이 밝아지고 있다. 평소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걷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몇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네들이 평상시와는 달리 실루엣으로 보인다. 걷기 시작한다. 숲 속에서 귀뚜라미들의 떼창을 하고 있다. 어쩌면 며칠 전에도 그 소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설마 하니 오늘이 처서라고 귀뚜라미들이 이렇게 요란을 떨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떼창을 인식한 것은 지금이다.


산책로를 반 바퀴 도는 데 어디선가 숨소리가 깊고 요란하다. 잠시 멈춰 귀 기울여 본다. 깊은 숨소리는 소나무에서 나는 거다. 어제 내린 많은 비를 두껍고 투박한 껍질로 머금은 흑송들. 그 나무가 그 빗물을 온몸으로 담아내기 위해, 짙은 진갈색 껍질을 폐처럼 움찔 거리며 내는 소리다. 그 나무들 밑에 머리 조아린 맥문동들도 그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듯하다.


몇 바퀴를 아무 생각 없이 돈다. 시쳇말로 멍 때리며 걷는다.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그러나 도무지 이어지질 않고 엉킨다. 갑갑한 마음이 가슴을 짓누른다. 고개를 흔들면 잡념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해 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자, 입에서 끙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찰칵... 다가오는 가을의 문턱에서 깊이 고개 숙이는 맥문동을 찍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삼각대 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열정이다. 대부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다. 순간 나도 카메라로 이 깊고 요란한 소리들을 담아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실상이 아닌 소리를... 하지만 주말로 미루고 돌던 길을 계속 이어 걷는다.


며칠 전만 해도 맨발 족이 꽤 되었는데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딱 한 사람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발과 땅이 부딪치는 소리와 끌리는 소리로, 마찰음으로 길이 평소 새벽길 같지 않다. 그 소리는 마지막 남은 어둠을 지우고 적막을 찢는다. 불협화음이다,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소리들이다.


걷기를 멈추고 긴 호흡을 내뱉고 있는데 나무 가지 사이로 까치가 운다. 왜 우리는 그것을 운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운다고 하지 말자, 나는 요란한 외침이라고 말하련다. 올려다보지만 새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 까치는 손님을 알리는 것이라는데, 오늘날 찾아 올 손님은 누구일까?


차로 돌아와 준비해 온 커피를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온 몸에 담는다. 처서 아침에 만난 소리들. 탈탈탈 모터 소리... 귀뚜라미들의 떼창... 소나무와 맥문동의 숨소리... 나의 신음... 맥문동이 찍히는 소리... 불편한 발자국 소리... 까치의 외침... 그리고 내 갈증이 젖는 소리.


문득 10여 년 전 처서 날, 쓴 시를 핸드폰으로 찾아 소리 내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묻다/ 바람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초복 전 날, 먼 땅에 있는 이에게/ 내 가난한 안부를/ 긴 한숨에 묻어 보냈고/ 한 여름 내내 답은 없었다...>


                   (답은 없었다. 작은 소리마저도...) 그렇게 나는 처서와 함께 온 소리들과 조우한다.


                  <10여 년 전 처서 때나 지금이나 어찌 이다지도 여전히 피폐한 지... 병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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