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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26. 2022

<삶>이라고 쓰고 <지지고 볶는 것>이라고 읽는다

가끔 캘리그래피를 친다

몇 해 전 캘리그래피를 배운 적이 있다. 첫 수업 때 강사가 캘리의 장점은 서예와는 달리 필법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자유분방함에 있다고 했다. 그 방식이 맘에 들었다. 화선지를 깔고 붓으로 글씨를 써 나갈 때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다. 잘 쓰고 못 쓰고 따질 실력이 아니니 더 자유로웠다.


그날 접시만 한 둥근 원 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글이나 시 같은 것을 써보라고 했다. 몇 개 단어를 연습 삼아 써보았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시 한 편을 캘리그래피 서체로 쓰고 흡족해했다.

<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빨리 눕는다 더 빨리 울고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주류와 반(비) 주류'로 구분하곤 한다. 술 마시는 사람과 안 마시는 사람의 구분이 아니다. 기득권을 말하는 거다. 그 힘을 쥐고 있는 무리가  그 사회의 주류다.


그들이 세상의 틀(法)을 만들면, 반 주류는 불만이 있어도 받아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반 주류가 주류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자포자기만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 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반 주류 중에 한 사람으로 나는, 시인 김수영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반성하며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빈곤했지만 아첨해야 하는 삶을 거부했다.


김수영은 자유주의자다. 문단에서 혹자는 그를 진보적인 인물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분방한 상상력과 예민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그의 시를 드려다 보면, 그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진정한 자유주의자임을 인지할 수 있다.


내 젊은 날 그의 시들을 읽고 자괴감에 빠져 무기력하게 한숨만 쉬던 일이 잦았다. 그중 <푸른 하늘을>.

“... 자유(自由)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어린 나에게 자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성취의 대상도 고민해야 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위해 날아오르고, 피 냄새를 맡으며 두 눈을 부릅뜨며 일갈하고 있었다.


고독이란 단어는 내게 있어 어쭙잖은 연애 글의 파편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혁명의 또 다른 속성이었다. 피상적인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오인한, 나의 노예근성적인 사고에 대해, 그는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또 다른 시에서, ‘나는 왜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 라며 식당에서 시킨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화내고, 설렁탕 집 야비한 여주인에게 돼지 같다고 욕한다. 비 오는 날 길에서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 주기도 한다.


스스로 옹졸하고 비겁한 자신의 민낯을 여과 없이 고백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지인에 따르면 실생활 속에서도 달걀 장사를 하면서 몇 푼도 되지 않는 값 때문에 손님과 싸우고,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자,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물론 이런 사소하고 아득바득하는 소심함과 한심한 행태에 대해 시인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기모멸로 이어짐을 고백하고 있기도 한다. 나는 이 대목에, 이 인간미 철철 넘치는 흔적에, 방점을 찍는다.


만일 김수영이 모든 면에서 퍼펙트하고 무결 점적이며 곤핍한 삶에서도 지고 지선 한 삶만 살다가 죽었다면 그는 이 시대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시인, 시인 중에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으며 또 자유를 사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공감한다. 시 몇 편이나 글 몇 개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시인은 나보다 행복할 수 있다. 뭐든 읊으며 살 수 있으니.


어쨌든 나는 시인도, 무슨 능력자도 아니다. 나는 내 일상(日常)을, 한 글자로 <삶>이라 쓴다. 그러나 읽을 때는 <지지고 볶는 것>이라고 종종 읽는다. 켈리를 칠 때마다 가끔 김수영 시인을 기억하고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면서 횡설수설하는 날이 잦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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