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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12. 2022

그때 그 시절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 한토막.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간이다. 아직도 스포츠머리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대부분의 사내아이들과 어설픈 화장을 한 여자아이들이 서로 서먹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웅성웅성거리고 있다. 그때 강의실에 나이 지긋한 한 사람이 들어서자 조교라는 사람이 그를 소개한다. 


소개받은 사람은 그 대학 영어영문학과 학과장이었다. 노교수는 "여러분들과 인문학을 4년 동안 같이 공부하게 되어 반갑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흡족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겸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영어영문학과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이런 애매한 질문에 용감하게 손을 버쩍 들고 답하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다. 다들 노교수와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노 교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저기 키 큰 학생 일어나서 말해보게”

엉겁결에 남들보다 단지 키가 좀 크다는 이유로 선택된 그는, 쭈뼛 거리며 일어서서 머리를 끌쩍이다가 한다는 말이, “제가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영문도 모르고... 왔기 때문입니다.”


순간 강의실은 학생들이 웃고 책상을 두드리고 발 구르는 소리로 난리가 났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학생들은 지금도 그 노교수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웃음을 참아야 하는, 그러나 통제하기엔 너무 힘들어하던 모습을.


그 키 큰 괴짜의 기행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학교 매점에서 식사 후 디저트로 오렌지가 나왔다. 그러자 그가 진지하게 마주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아점(아침 겸 점심)이 영어로 뭔지 아나?” “브런치?” “오우케이. 그럼 오렌지가 영어로 뭔지 아나?” “아... 뭐지?” “아, 그것도 모르나? 델몬트 아니가” “... 그런가?”


그가 또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 친구도 대학 1학년인데 벌써 ‘원서’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주위 친구들이 그건 아닌데 하면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영문과도 원서는 3학년 때부터 본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는 기죽지 않고 친구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듣다못해 옆 친구가 물었다. “네 친군 어느 대학, 무슨 관데?” 그러자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응, 우리 학교 국어 국문학과.” 그 말에 친구가 뻘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맞긴 맞는 건 같은데... 어째 좀...”


어느 날 그가 강의실에서 귀한 걸 보여 주겠다면 변죽을 울렸다. 늘 그의 황당한 언행에 당하던 친구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가 말했다. “니들 그거 아나? 나이키에서 한국 사람들을 위해 고무신 만든 거?” “뻥치지 마라” 그 말에 그가 가방에서 진짜 흰색 남자 고무신을 꺼냈다. 그 고무신을 보고 친구들은 다 뒤집어졌다. 그 고무신에 매직으로 나이키 로고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사촌 형이 군대에서 한미 군사훈련 중 미군의 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생맥주 집에서 안주 삼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진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모 대학 영문과(문법이 강함)가 아닌 영어과(회화가 강함)에 재학 중, 군에 입대한 사촌 형이 한미 군사훈련 때 소대장으로부터 특수 임무를 받게 되었단다. “너 영어 좀 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말고 미군 애들한테 양담배 좀 구해 와, 그러면 훈련 기간 중 열외(훈련에서 제외) 시켜준다” (그 당시엔 지금과 달리 양담배가 단속되던 시절임)


열외라는 말에 사촌 형은 이리저리 훈련장을 돌아다니다가 만만해 보이는 흑인 병사에게 다가 가 영어로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친분을 나눴단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See you later."이것도 인연인데 기념으로 담배나 교환하자”라는 말에 미군 병사도 O.K. 한국군 담배 ‘화랑’과 양담배는 그렇게 맞교환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덕에 사촌 형은 한미 훈련 내내 편하게 보냈고, 마지막 훈련 전날 또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양담배를 구해 와야 했다. 미군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사촌 형은 전에 만났던 그 병사를 발견하자 쫓아 가, 감격의 포옹을 하면서 이제 언제 다시 보겠는가. 이렇게 헤어지기 섭섭하니, 전처럼 담배를 교환하며 아쉬움을 달래자, 하며... 어쩌고 저쩌고...


그러자 그 병사가 갑자기 자신의 총을 사촌 형에게 들이대면서 별 쌍욕을 다하더라는 거였다. 아마 주위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사촌 형은 그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졸지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미군에 의해 사살된 한국군이 될 뻔했단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군에게 지급되던 화랑담배는 담배라고 하기에 좀 거시기한 거였다. (지금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재다. 그것도 상위 1% 아재) 화랑은 일단 상상을 초월한 쓴 맛과 필터가 없거나 부실해 담배를 빨아 당기면, 정제되지 않은 연초 잎이 목에 걸리는 무늬만 담배인 최악의 담배였다. 그런 걸 기념이라고 맞교환했으니 그 미군 병사 입장에서는 자기를 골탕 먹이는 것으로 안 듯 싶었다. 아니 자기를 살해(?) 하기 위해 독초를 줬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멀고도 먼 그때, 자기 이야기도 아닌 사촌 형의 에피소드를 참 진지하게 말하던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전부 다 팩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다 듣고 나면 아리송했다. 아리송해도... (이 화랑 이야기를 듣고 개뻥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요즘은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을 기회조차도 없다. 그때 그 시절이 참 까마득한 옛날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아빠는 그 앳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어린 아들이 물어보기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이 삶도 이 정도면 됐다, 라면서.


          <8월이 깊어가고 있다. 황성공원 맥문동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월은 어김이 없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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