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영철 Francis Jul 30. 2022

우울한 날 책 읽기

8시 기차

며칠 전 서재에서 뒹굴다 책 한 권이 손에 잡혔다. 김훈이 쓴 <공터에서>다.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아 읽었던 책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낯익은 공터(?)에서 다시 그 책을 뒤적였다.  분명 읽었던 책이건만... 첫 문장부터 낯설었다. 요즘 심신이 피폐(疲弊)한 나는, 해가 져 활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책에 빠져 있었다.


피폐... 때문에 한번 더 읽게 된 책. 읽으면서 후회했다. 우울할 때 비가 오면 더 우울해지듯이, 요즘처럼 심신이 상(傷)해 있는 나는, 이 책을 또 읽지 말았어야 했다.


어제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스터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들지 못하고 있다가 밤늦게까지 다시 그 책을 붙들고 마무리했다. 부분 부분 분명 내가 남긴 흔적들이 -줄 치기와 단순한 첨언들- 낯설다. (나는 왜? 그때 이 문장에 줄을... 그리고 이 글에 토를 달았을까) 


여전히 글이 노련한 김훈은 마차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현대사의 사건들을 부모, 형, 동기... 들과 각각 묶어 <기쁨과 영광은 작고 치욕과 모멸이 가득>한 그들의, 아니 우리들의, 아니 나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며칠 이런저런 일로 먹거리가 불편했던 난, <배가 고프면 창자에서 찬바람이 일었고 몸속이 비어 투명했다>, <냄새도 식량이 되는지>라는 문장에선 그에게 나의 형편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하기도 했다.


몇 해 전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그날 밤에도 이성을 잃은  말 같지 않은 그 황당함에, 나는 분노로 대하다가도 병이 깊어 저럴 거라는 애처로운 생각에 입을 닫아 말을 섞지 않았다. 누운 곳은 춥고 어두웠다. 모두 버리고 싶은 맘 간절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 책을 덮고 잠들었다.


새벽 창문을 열고 보니 비 같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운동 안 갈 핑계가 생긴 나는, 찬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출근길에 나섰다.


안개가 홍수처럼 뒤덮고 흐르는 길을 달리며 한번 더 읽은 책, 그러나 어쩐지 낯선 글의 잔영은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엔 비가 내리길 원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날에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같은 노래는 듣지 말아야 한다. 난 진작에 <공터에서>라는 이 쓸쓸한 제목에서 그 애절함을 눈치챘어야 했고  다 읽지 않았어야 했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매거진의 이전글 추억의 먹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