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주년 광복절이기도 한 오늘은 절기 상으로 여름의 끝자락인 말복(末伏)이다. 게다가 가톨릭에서는 성모승천 대축일이라 이탈리아 등 적지 않는 유럽 국가에서는 공휴일로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도 길이 훤하다. 다니던 헬스장이 내부수리 중이라 이번 일주일은 황성공원 숲길을 걷기로 했다. 체육관 러닝머신에서 TV를 보면서 걷는 5Km는 50여분 소요되지만 좀 지루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공원 여섯 바퀴(5.76Km)를 도는 1시간은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 얼추 시속 6Km의 나만의 여유로운 시공(時空) 간이다. 수많은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노라면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세상 바쁠 것 없는 (간혹 뛰거나 속보로 걷는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할배와 할매들은 별 이야기 다 쏟아내며 걷는다. 어제 먹었다는 음식, 건강 이야기, 자식 자랑도 하지만 며느리 흉도 본다. 등등, 별의별 말을 다한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본의 아니 게 듣게 된 대화의 파편들이다. 듣기 싫어도 워낙 이곳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렁차,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목소리 톤 때문에 처음 경주 와서 살 땐, 서로 싸우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하며 지낸다.
요즘 그 길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단연 맥문동이다. 뿌리의 굵은 부분이 보리와 비슷해 맥문(麥門)이라 하고 겨울을 이겨 낸다고 해서 동(冬)을 붙인 맥문동. 이 꽃은 몇 해 전부터 깊은 여름만 되면 황성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960m 한 바퀴를 돌 때 맥문동 세 군락을 만난다. 대충 눈대중한 계산이지만 동남쪽의 천 평은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 위 삼천 평은 아직 보랏빛을 머금지 못했으며 가장 북쪽 이천 평 맥문동은 이제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 만개하려면 며칠 더 지나야 할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른 시각에 카메라를 든 이들이 적지 않다. 차림새를 보고 그가 경주 사람인지 타지 사람인지 구분한다. 나도 외지로 출사를 가면 그곳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자 미소로 눈인사를 건넨다.
숲길을 걸으며 그들이 사진 찍는 모습을 곁눈질한다. 전경, 중경, 근경, 클로즈업, 그리고 스토리텔링 사진까지. 나는 오늘 카메라 없이 오롯이 걸었다. 가끔 핸드폰으로 찰칵거리기도 하면서.
한눈에 보이는 전체의 풍경,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과 맥문동 군락을 전경(全景)으로 찰칵.
중경은 맥문동과 하나 정도의 피사체와 엮어 찍는 거다. 고목이나 초록 숲 등을.
근경은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 맥문동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찍는 거다.
클로즈업은 아웃포커싱을 하면 좋다. 그러면 맥문동 외 것들은 모두 흐릿하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스토리텔링 사진을 만들어 보는 거다. 그냥 맥문동만 넣으면 재미없다. 맥문동에 인물을 넣어 보기.
이번 주말부터는 카메라를 들고 새벽부터 황성공원 인근에서 맥문동을 찍으며 한 동안 틈나는 대로 뒹굴 거릴 거다. 뒹굴 이유는 올 가을 사진 전시 때 필요한 ‘이중(다중) 노출’ 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뒹굴거리며 놀 계획이다. 뒹굴~뒹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