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
살면서 스스로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 나 변명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이렇게 <태도와 행동>이 일관되지 않거나 모순될 때마다, 불편하다.
그럴 경우 이를 일치하도록 자신의 행동에 변화를 준다. 이런 걸 <인지부조화에 의한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야기에서 그 쉬운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여우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따 먹을 요량으로 펄쩍 뛰어올라 보았다. 하지만 포도는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다시 한번 시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여우는 결국 포도를 따 먹지 못하고 가던 길을 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저 포도는 분명 덜 익어서 시고, 맛도 없을 거야.’
처음엔 그 포도가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우는, 그것을 따 먹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것이다. 여우에게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내 젊은 시절에도 저 여우가 겪은 유사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인지부조화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니 그것보다는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그건 <내 영역이 아니다>라는 말을 더 자주 읊조리곤 한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천명(知天命) 같은 유사한 말이 회자되는 걸까.
며칠 전 홀로 황성공원 산책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이 만큼 세월에 물들어 가면서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할 수 없는 일은 어떤 것일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고맙게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을 챙겨 보니 그 부재에 대한 미련은, 손톱만큼도 아쉽지 않았다. 단언컨대 인지부조화는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있는 일도 되짚어보니 그것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만큼 차고 넘친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는 순간, 피로감이 엄습했다. 명치끝이 아렸다.
지우고 싶은 기억, 원하지 않았던 오해의 시작 등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스크래치들. 그러나 설사 그것들을 다 지운다 한들 또 다른 아픔들이 내 생살을 헤집고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 현실이 겨우 버티고 있는 무릎의 힘마저도 빼고 말았다.
방금 전화를 끊었다. 긴 한숨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먹먹했다. 어디 가서 낮술이라도 마시고 정신 줄을 놓고 싶다. 늘 자중자애하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자중자애해야 할 것 같다.
마음속에 분명 아무 일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상처가 되었고 그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인정해 주자. 받아 드리자. 모두가 힘들 것이다... 이 현실은 내 영역이 아니다고 또 중얼거린다. 얼마 전부터 이제 그 말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산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에 더 견디어 내기에 점점 힘들다.
할 수 있는 일에 소홀히 대처하면서, 할 수 없는 일에 욕심을 내고 집착하고 미련을 갖는 내 어리석음이, 나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 병은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 건 <절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절망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스스로에게 다독여 본다.
<경주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 혼란스러운 마음은 피사체마저도 그렇게 보이는 것 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