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지수에 관한 수다
독일 경제학자 엥겔(1821~1896)이 ‘엥겔지수(법칙)’를 말하면서 가난한 가족일수록 이 지수가 높다고 했다. 생활비 중에서 먹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클수록 수치가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가만히 보니 우리 집은 엥겔지수가 높은 편이라는 알았다. 퇴근 후에 내가 먹을 술안주는 안 사더라도 막내아들 먹거리는 꼭 챙기는 편이다. 뭐가 먹고 싶다면 어쨌든 구해다 준다. 큰 딸이 귀가 인사를 하면 내 응답은 ‘왔니? 밥 먹어라.’다.
빈곤한 나는 두 대의 냉장고엔 이것저것 사다 넣고 아이들만큼은 굶주리지 않겠다는 눈물겨운 부정(父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먹는 것에 목숨(?) 거는 나는 참 멋없는 아빠다. 먹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요리에 관한 이야기 하나!
나는 평생 욕을 별로 듣지 않고 살았다. 그 험한 군대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말하는 욕은 상대가 내 앞에서 대놓고 심한 욕을 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한 성격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주위 사람들이 선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그런데 뒤돌아서면 가끔 귓속이 가려운 이유는 뭘까)
이런 내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욕 다음으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다. 국물이 없다고? 그럼 밥을 어떻게 먹어?
요즘 남자들은 월급을 구경도 못하지만 그래도 월급날엔 나는 내 나름대로 비상금을 털어 식구들에게 외식이나 치킨 같은 것을 시켜준다. 외식을 가기 전 의례적으로 아이들에게 물으면, 내 취향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자고 한다. 스테이크, 피자, 스파게티, 돈가스 등. 정말 국물도 없는 음식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꼭 국물이 있어야 한다. 칼국수, 해장국, 매운탕... 요리로 따지다면 동양에서는 중국을 엄지 척 하지만 서양에서는 프랑스다. 그런데 이런 국물 있는, 끓인 음식이 프랑스에서는 최하급 요리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최고요리는 귀한 재료와 고급 포도주로 만든, 가급적이면 귀한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린 요리다. 두 번째는 오븐에 넣어 구운 요리다. 오븐에 넣으면 기름이 싹 빠지고 재료가 골고루 배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직화나 프라이 펜을 사용하는 거다. 마지막 하급은 냄비에 음식을 끓이는 거다.
냄비에 물을 함께 끓이는 요리는 프랑스인들의 좋아하는 재료 자체의 맛이 국물로 우러나와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질색한다. 국물 있는 요리는 가난한 흥부네 집에서나 먹은 요리다, 그건 요리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냥 음식이다. 고기 몇 점에 국물을 많이 넣어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만든, 남자들 옛날 군대 짬밥시절 소가 지나간 무늬만 소고기 국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물이 아닌 포도주를 넣고 끓여내는 것은 예외로 친다고 한다. 나는 그런 요리를 먹어 보지 못해 아는 요리 이름이 없다. (포도주는 그냥 마시는 거다. 그 아까운 것을...)
프랑스 요리가 이처럼 다양하고 고급지게 된 이유는 보통 3가지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는 지리적으로 대서양과 지중해에 접해 있으면서 북부와 남부 간에 기후 차, 그리고 산악지역의 발달로 한대와 난대의 동, 식물을 구할 수 있어서다. 두 번째는 인종의 다양성에서 기인한다. 기존 유럽의 켈트, 라틴, 게르만 족 뿐만 아니라 과거 프랑스 식민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은데, 베트남, 모로코, 알제니, 세네갈, 가봉 등 이 그들이다. 이 정도면 세계 각 대륙의 맛은 베이스로 깔린다. 여기에 마지막 결정타는 프랑스 궁중요리의 대중화다.
그 배경은 이렇다. 프랑스는 다른 유럽나라와 달리 성공한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난 나라다. 이웃나라에서는 한 번이나 두 번 심지어 독일 같은 경우는 (성공한) 혁명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독일 사람은 혼자 있으면 천재, 둘이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세 명 이상이 모이면 전쟁을 일으킨다. (제1,2차 세계대전의 주범) 반면 프랑스는 혼자면 센스쟁이, 둘이면 사랑을 하고 셋 이상이 되면 혁명을 한다는.
프랑스에서는 1789년 시민의 힘으로 일으킨 대혁명을 필두로 여러 차례 혁명이 있었다. 이때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되면서 왕정이 사라진다. 이로 말미암아 졸지에 실업자가 된 당시의 궁중 요리사들이 대거 대중식당을 오픈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혁명은 프랑스에 ‘자유, 평등, 박애’와 더불어 궁중, 귀족 요리가 민주화되어 전 국민에게 보급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보문에 가면 볼 수 있는 '청와대 칼국수'도 그런 경우인가?
이렇게 먹는 것에 목숨 거는 (엄청 비용을 쓰는) 프랑스 대부분의 가정에서 당연히 엥겔지수는 엄청 높다. 엥겔은 프랑스가 이런 안정적인 시대를 즐기기 전에 사람이다. 엥겔지수가 꼬인다. 엥겔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세상 규칙에는 가끔 <예외>라는 것이 있다.”라고.
이번 주말이 성탄절 이브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잘 살 건 못 살 건, 어찌 되었던 모두 다 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다 함께 둘러앉아 칠면조는 못 먹어도 같은 ‘ㅊ’를 쓰는 치킨이라도 먹자. 엥겔이 뭐라고 했던. 다 잘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참, 엥겔지수에는 외식비용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니 엥겔지수 때문에 찝찝한 생각이 들면 외식은 어떨는지?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