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Tabula rasa

5월의 어느 아침

라일락이라고 읽고 싶다

by 장영철 Francis

옛날 코미디 한 장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한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들의 이름을 따, 이렇게 긴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그 긴 이름 때문에 물에 빠진 아들을 제 때에 구하지 못해, 잃고 만다는 코미디를 본 기억이 있다. 웃자고 만든 거지만 씁쓸한 여운을 남긴 코미디였다.


천주교 신자는 세례를 받을 때 새롭게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세례명을 받거나, 정한다. 그 수호성인의 삶을 본받아 신앙 안에서 참되게 살겠다는 다짐에서다. 요즘 유행(?)하는 개명(改名)도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에서 거나 아니면 새 직책을 부여받거나 할 때 한다.


하느님이 아브람과 사라이를 아브라함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주고 그것이 그들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게 한다. 예수도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는 영예를 부여할 때 베드로라는 새 이름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교황으로 선출되거나 수도자의 허원식 때, 새 이름을 가질 수 있다.


개명으로 또 유명한 이가 바오로다. 열렬한 유대교도였던 사울이 그리스도교인들 탄압에 앞장섰다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심(回心)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사울에서 바오로로 개명한 것이었다. 이후 그리스도교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바오로 덕택에 신약 성경의 27권 중 13권이 그가 쓴 서간으로 구성된다.


십수 년 전 경주로 이사와 자주 찾던 곳이 남산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새벽에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그날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에 홀로 남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산길에 아무도 없었다. 어둠과 5월의 라일락 향과 나 외에는. 그런데 그 ‘어둔 혹은 검은 산’이 전혀 낯설지 않고 포근하게 다가왔다. 그때 떠오르는 현산(玄山), 말 그대로 ‘검은 산’이 그날 이후 내 필명(筆名)이 되었다. 어떤 이가 내 필명이 승려의 법명 같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아무튼 현산은 그렇게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다.


얼마 전 포항에 일이 있어 갔다가 카톡을 받았다. <태월. 兌月- 달은 시간을 의미, 시간이 갈수록 빛난다, 라는 의미> <동운. 東夽 - 동은 생명, 인간, 시작을 의미. 생명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한다, 라는 의미>. 태월과 동운. 대구에서 성명학(姓名學)으로 나름 인지도가 높은 지인이, 내 필명과 아호(雅號)를 지어 카톡으로 보내온 것이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알려 달라고 해서 보낸 게 며칠 전이었다.


동운의 의미대로 살 자신이 없어 쭈삣거렸으나 태월은 살갑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빛난단다. 일단 죽지 않고 시간만 보내면 뭔가가? 된다는 말이다. 빛난다고 했으니 혹 대머리? 가 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우 케이. 태월을 필명 겸 아호로 쓰기로 했다. 그렇다고 현산을 안 쓰겠다는 말은 아니다. 현산은 현산이고... (태월에 흡족해하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가?) 그때 포항 낯선 거리에서 스치는 라일락 향기가, 그 옛날 남산 어둔 새벽 기슭에서 맡았던 라일락 향과 오버랩되었다. 묘한 일이다.


태월이라고 쓰고 라일락이라고 읽고 싶은 5월 어느 아침이다.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이다. 젊은 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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