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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Jun 03. 2022

초 여름밤의 꿈

꿈인 듯, 아닌 듯

‘귓속의 캔디’라는 말이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달콤한 말을 들었을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며칠 전 새벽에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리처럼 벌레(?)가 된 내가, 또 다른 벌레와 싸우는 꿈을 꾸었다. 천재들은 꿈을 컬러로 꾼다고 하는 데, 나는 컬러, 아니 흑백은 고사하고 바란 색의 어정쩡한 형상의 꿈을 꾸었다. 그 와중에도 희한하게 나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각... 사각’ 왼쪽 귓속이 가려웠다. 그때 그게 꿈인지 생신지 헷갈렸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생시인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뭔가가 내 귓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귓속의 캔디가 아니라 ‘귓속의 벌레’인가. 얼른 면봉으로 닦아냈고 아무 일 없는 듯, 곧 다시 잠들었다.          


아주 어닐 적 어느 봄날 아침, 마당에 생전 처음 보는 소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뿔이 작은 암소였다. 특유의 선한 눈매 그리고 코뚜레를 한 채 목에는 워낭 종이 매달려 있었다. 거대한 덩치는 쉬지 않고 입으로 되새김질을 하면서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나로서는 조부가 사 오신 그 소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곳은 지금 서울의 서교동이라 부르는 동네다. 후에 DJ의 정치적 거점이 되었던 동교동 옆, 아니 최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인 홍대 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소’라는 말의 조합이 어색할지 모르나 당시(6,70년대)만 해도 서교동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소도 키웠다. 우리 집은 농사 때문에 소를 키 울려는 게 아니라, 나중에 송아지를 낳아 팔려는, 일종의 재테크로서 소를 키웠던 거라고 모친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꿈이 아니다.    


김천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던 조부는 먼저 상경한 아들을 쫓아 서울에 왔으나, 생면부지 서울에서 당신이 할 일이 별로 없으셨고 그래서 소 사육을 생각해 내신 것 같다. 생전 조모가 그런 조부를 볼 때마다 안쓰러워하시던 소리를 어린 나는 종종 듣곤 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사업 수완이 좋으셔 가마니에 돈을 쓸어 담았다는 전설의 조부가 -전설엔 늘 거품이 끼어 있기 마련이다- 이제 소 한 마리나 키우는...     


어쨌든 그 소 덕분에 꼬맹이인 나는, 재미 삼아 작두질을 해본 경험이 있고, 볏 집 등을 넣고 끓인 소여물의 구수한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마치 흑백의 오래된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때 그 소가 우리 집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송아지는 낳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소의 눈이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그때, 어릴 적 그런 소의 눈망울을 본 경험 때문에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어떤 사람이 떠올라 후다닥 잠에서, 꿈에서 깨고 말았다.        


짧은 초 여름밤 벌레에 이어 동물 꿈까지... 벌써 창밖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잠은 포기했지만 일어서지 않고 엎드려 침대 머리맡에 흐트러져 있는 책 몇 권을 뒤적거렸다. 며칠 전부터 각기 다른 작가(미야자키 마사카츠 등)가 쓴 <세계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같은 세계사 사건을, 작가들 각자의 같은 관점에서 혹은 다른 시각에서 보여주는 차이가, 읽는 내게 쏠쏠한 재미를 주고 있다.     


<이슬람 제국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 그런데 책에 실린 당시 지도에서 유럽 쪽의 어느 나라로부터 까만 점이 터키 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슬람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고정된 활자가 움직이다니 이렇게 헛것이 보이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내가 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아니라는 확신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다시 자세히 보니 활자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한 좁쌀보다 작은 책벌레였다. 가지고 있던 연필의 심으로 살짝 누르니 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귓속의 벌레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 새벽에 바로 일어나 찜찜한 맘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들을 죄다 책장으로 옮기고 이불을 창밖에서 털어냈다.     


그날 회사 점심시간 반찬 중에 소고기 국이 나왔다. 주방 아주머니가 남보다 많은 남의 살(소고기)을 내 국그릇 바닥에 깔아서 내주었다. 남다른 호의고 배려였지만, 그 전날 ‘벌레 꿈과 소 꿈’으로 뒤숭숭한 나에겐 편치 않은 식사였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문득 <자각몽과 예지몽>을 되짚어 보았다. 꿈을 꾸고 있으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진행되는 상황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자각몽’이라고 한다. 반면 꿈을 꾸었을 때 일어난 일이 현실화되는 꿈을 ‘예지몽’이라고 한다. 내 꿈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속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니 <자예몽(自豫夢)>이라고나 할까? 나는 혹, 무엇이 현실화되기를 소망하고 있기에 그런 류의 꿈은 꾼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응답하라... 추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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