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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Jun 17. 2022

회화 문맹자

무식하면 용감하다

입체적인 3차원의 세계를,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에 그려내는 회화(繪畵/미술)에 대해서 나는 거의 문맹(文盲) 수준이다.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몇 해전 가을에 미술사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특히 MA(현대미술) 혹은 CA(동시대 미술)에 방점을 찍으면서. (MA와 CA구분에 대한 담론은 학자들 사이에서 현재도 의견이 분분함)


리처드 오스본이 쓴 몇 가지 번역서를 훑었다. E.H. 곰부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읽을 만했으나, 할 포스터 外 3인이 공저한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앞에서, 나는 내 가난한 지식 때문에 절망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거의 박사학위(?) 논문 수준이었다.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그해 몇 개월 동안 다른 책은 손도 대지 않았다. 오직 미술에 관계되는 책과 자료만을 챙기고 읽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회 등을 찾아 나섰다.


맨 처음 간 곳은 대구 엑스코에서 개최된 ‘아트페어’였다. 아트라는 단어가 내 호기심을 끌었다. 나름 기대를 하고 주말 아침부터 서둘러 가서 1백여 부스를 둘러봤으나 내게는 평이해 보였다. 말 그대로 미술품을 파는 ‘미술시장’이었기 때문일까? 게다가 명품 옷과 가방을 챙겨 입은 사람들에게, 부스 담당자들이  한결같은 과잉친절을 보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각 부스 담당자들은 오직 그림 판매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장 철수...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며칠 후 ‘부산 현대미술관’을 가볼까 했으나 여의치 않아 ‘대구예술발전소’를 찾았다. <빛, 예술, 인간 -Light, Art, Humanity> 전시회. CA에서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뉴) 미디어아트의 세계적인 흐름을 소개하고 있었다. -미디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매개체 TV, 비디오 등/ 매체예술이라고 함- 폐막을 며칠 앞둔 마지막 수요일이라 그 흔한 리플릿 한 장 구할 수 없었다. 일단 들고 간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고 참고 자료는 나중에 찾아보기로 했다. 해외작가 8명, 국내 작가 6명이 참여해 20여 점을 선보였다. 그중 내 시선을 끈 (정확히 말하면 조금이라도 이해되는) 작품들에 대한 감상은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1층 제1 전시실. 출입구 벽에 있는 작가의 소개 등을 보니 아르튀르 데마르또(캐나다)의 <Fantastic Mexico>였다. 전시장 어둠에 눈이 적응을 못해 잠시 머뭇거리다 도날드 저드의 <무제> 같은 나무상자 의자에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마치 어릴 적에 봤던 그림자 인형극 같아 나름 흥미로웠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개념을 새로운 매체로 활용한 듯하다. 예를 들어 색의 자리에 빛을 대신한 거다. 저런 방식을 파노라마가 아니라 ‘디오라마’라고 하지 중얼거리며. 이런저런 장면을 카메라로 스케치했다. 거대한 도시에 각기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군상들.


2층에서 만난 제네비에프 아켄(나이지리아)의 사진들. 지구본을 머리에 쓰고 바디슈트와 장갑을 착용하고 찍은 퍼포먼스들. 사진작가의 시각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아켄의 사진을 요리조리 살폈다. 환경과 자연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언젠가 수강한 ‘통합 생태론’에서 말하던 지구 환경 등이 오버랩되었다. 촬영 테크닉은 좀 서툴러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작가가 굳이 사진 인화를 컬러로 하지 않고 흑백으로 처리한 이유도 아마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를 암시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제목은 <The Magic of Reality>.


맞은편 작품으로 눈길을 돌린다. 저 작품을 만든 사람은 한국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어디가 모르게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하광석 작가의 <Reality - Shadow>. 우리 사진작가들은 이런 기법을 역광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현실은 진짜 나뭇가지지만, 나비는 시뮬레이션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 그런데 나비와 나뭇가지는 좀 언밸런스해 보였다. 나비는 꽃과 잘 어울리듯 나뭇가지와는 나비가 아니라 새였으면 어땠을까. 아니다. 어쩌면 이것도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인지 모를 일이다. 속단하지 말일이다.


그 전시장의 메인 자리엔 라이너 융한스 (독일)의 <GMT+그리고 From Yokohama to Tokyo>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닷물 영상과 비치된 헤드셋 그리고 책을 통해 작가는 뭘 말하려고 하는 걸까? 우리로 치면 인천(요고하마)에서 서울(도쿄)과 대비할 수 지리적인 위치인데... 의미를 찾다가 성과 없이 옆 전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니스린 부카리(시리아)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명 <The Map is Not The Territory>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고 번역. 이 작품은 편안하게 볼 수는 있었지만 이해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곤혹스러웠다. 내 눈에 인간의 실핏줄 찾기라고 이름 붙이면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영어 자막이 흘러나와 해석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도무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옆 전시장에서 손경화 작가의 <Every Second In Between>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에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이제 팔레트 위에서 사용되는 것은 더 이상 물감이 아니다.” 맞다. 그것은 각종 매체에서 사용되는 이미지와 텍스트들이었다. 1시간 넘게 홀로 전시장을 돌고 나서, 문맹자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전에는 시(詩)가 우위라는 의미에서 “시는 말하는 회화요, 회화는 말없는 시다.”라고 했던 시모니데스(기원전 4백여 년 당시 그리스 시인)의 말을 경구(警句)로 삼았는데,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한 “시는 눈먼 회화요, 회화는 눈 뜬 시다.”라는 회화가 우위라는 말도 경구로 삼아야겠다,라고.


제목-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그래 지도는 주로 종이이긴 하지...) 미술은 이제 더 이상 캔버스 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그날 대구 예술 발전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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