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vant gard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영철 Francis Jun 21. 2022

아방가르드

정찰대

지지난 주 토요일 TV 앞에서 미드를 보느라고 하루 종일 10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나도 가끔 이런 미친 짓을 하곤 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기 시작해, 점심은 대충 군것질로 때우고, 해가 지고 나서야 끝냈다. 그 유명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 10부작 미니 시리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훈련소에서부터 노르망디에 상륙해 종전까지... 실화라고 해서, 전투신이 화려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에 참여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기(?) 비슷한 동기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TV 영화채널에서 하도 띄엄띄엄 봤기에 이번에 1회부터 10회까지 쫑을 내자, 라는 맘에서라고나 할까.


전쟁 영화치고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박진감이 덜하지만 굳이 감상 포인트를 찾자면 ‘애국심, 리더의 자격, 전쟁과 평화’ 정도? 그것들과 더불어 나는 방점을 하나 더 찍었다. 매 회마다 등장하는 '정찰대'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본대에 앞서서 적진으로 들어서 임무를 수행하는, 불어로는 ‘아방가르드’라고 한다. 예술계에서는 전위(前衛) 예술가들을 그렇게 부른다.


모더니즘 다음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한다. 그다음은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요즘은 CA (Contemporary Art)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예술의 새로운 사조는, 그 이전의 시각에서 보면 아방가르드가 된다. 구상화 시각에서, 추상화는 아방가르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AA(아카데미 예술) 시절(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 규범과 틀을 의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미술)에 그림의 소재는 단연  ‘성화(聖畵)나 역사화’가 최 상위였다. 그다음은 인물화, 정물화, 풍속화 순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캠퍼스에 담는 건, 3류 화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치부됐다. 그 당시 ‘마네, 모네, 세잔, 르느와르’ 등이 그런 일상을 그렸고 그들은 그 당시 아방가르드가 된다. 그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기에,  전시회다운 전시회를 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당시 미술계 권력자들은 그들을 ‘인상파’라고 불렀다.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본 평론가 루이 르 루이- 천박한 것을 (일상의 것들) 소재로 태양 빛 운운하면서 거친 붓 터치가 인상에 남는다는, 비웃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지금은 거꾸로 인상파가 미술 역사에서는 태두다. 그들을 비웃던 권력자들은 지금은 미술사에서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이 중에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시작한 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화가의 길로 들러 선 경우다. 전직 개신교 목사 출신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신학교 출신은 아니었다- 평생 그림 한 점 팔아 보지 못하고 화상(畵商)이었던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기대 살아야 했던 고흐. 침울한 성격에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아방가르드 중에 아방가르드였다.


AA 눈에는 고흐는 허접한 화가였다. 회화의 정석을 무시하고 너무 자유 분망 했다. 형상과 색채를 변형해 내면의 감정을 캔버스 옮기는 그 거친 붓놀림을 정신병의 원인으로 보았다.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고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130여 년 전 1890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격정, 불화, 광기의 아방가르드 고흐는 37살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지난 주일  홀로 도서관 구석에 앉아 고흐를 또 만났다. <까마귀 나는 밀밭> 그림을 펼쳐 놓고 10시간은 아니지만 한참을 드려다 보았다. 이 그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평론가들의 글은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인간은 글을 통하여 생각하는 유일한 동물이긴 하지만 고흐의 이 그림을 글로, 이해하기 싫어서다. 아주 어릴 때 (중학교 때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 빈치 같이 웅장하고 신비롭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그때 나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제대로 그 감동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게 종종 있다.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게 많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로 다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카메라를 들었다. 하나의 글자에 뭔가를 담아내고 싶어, 캘리그래피를 치고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책 저책을 뒤적이면서 출구를 엿보지만 녹록하지 않다.


귀가 길에 돈 맥클린이 부른 <빈센트>를 들었다. 1890년의 어느 여름의 폭염을 더듬으면서.


[별이 빛나는 밤, 팔레트에 푸른빛과 잿빛으로 채우세요...

나는 이제 이해한답니다. 당신이 말하려 한 것들을. 그리고 맑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맥클린의 <빈센트>는 바로 빈센트 반 고흐, 그를 노래하고 있는 거다.  

고흐는 다른 화가와는 달리 유독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 이유는 모델비를 지불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서글픈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회화 문맹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