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의도적으로 미리 암시하는 기법을 <복선>(Foreshadowing)을 깐다,라고 한다. 그것을 처음 볼 때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의 관련성을 깨닫기 어렵고 생뚱맞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복선은 사건의 진행을, 작가나 감독이 암시하고자 한 의도적인 장치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 (Great)’은 옛 연인 데이지에 대한 최고의 지고지순한 개츠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평범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매일 파티를 열 수 있는 엄청난재력가라는 것에 대해 ‘위대한’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사후 사람들로부터 ‘잘났어...(빈정거릴 때 Great)’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도, 작가(F. 스콧 피츠제럴드)의 의도된 복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 첫 문장을 읽고, 제목과는 달리 이 소설의 결말이 새드 엔딩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새침하게 흐린 폼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라는 문장에서 추적추적한 비는 음산한 분위기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된 일종의 복선이다.
천주교 신자라면 사순절 성 목요일 저녁 미사 후, 성전 제대 위 대형 십자가가 큰 자색(보라색) 천으로 가려지는 것을 보고, 가슴 저려한다. 그 색의 의미를 알기에, 우리는 황순원 소설의 <소나기>에서 소녀가 한 말,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글을 읽을 때 소녀의 죽음 예상한다. 이것도 일종의 복선이다.
영화 <식스 센스>에서 보여주는 복선. 유령이 보인다고 말하는 콜(소년-할리 조엘 오스먼드 扮)을 상담해 주는 아동심리학자인 말콤 박사(브루스 윌리스 扮)의 의상은, 그가 영화 초반기에 총 맞을 당시의 외출복과 항상 동일하다. -유령은 옷을 갈아입지 못함- 또 말콤을 만나는 콜은, 춥다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가곤 한다. -유령이 나타나면 주위의 기온이 낮아진다고 함-
감독은 이런 식으로 말콤이 유령임을 영화 내내, 이곳저곳에 의도적으로 복선들을 깔아 놓았다. 하지만 보통 관객은 스토리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미리 등장한 설정해 놓은 복선들을 놓치고, 영화 끝 장면에 가서야 말콤이 유령임을 확인하곤 그 반전에 소름 돋음을 경험한다.
소설을 읽을 때나 혹은 영화를 볼 때 나는, 핀셋의 눈초리로 예리하게 한 개의 복선도, -한 단어나 대사에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기억하기를 즐긴다. 그리곤 다음에 펼쳐질 장면을, 혹은 대사를 예측하고 곧잘 맞힌다.(?) 그래서 집에서 영화를 볼 때, 이렇게 구시렁거리는 내게, 시끄럽다고 식구들이 눈총을 주곤 한다. ㅠㅠㅠ
어떤 면에서는 문학작품보다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복선을 깐다. 하지만 그 복선은 그런 곳에서만 존재할까? 아니다. 삶에도 수많은 복선이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할 뿐. 신경이 여린 나는, 여전히 이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적지 않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며 산다. 회사 일로 가지각색 사람들을 만나보면 주류라고 혹은 비주류라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 같은 종교 안에 있는 교우들. 신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 동우회 사람들. 같은 것을 배우는... 심지어 사진 출사를 가서 만나는 다양한 현지인 등등
그들 중 어떤 이들과 섞여 있을 때 나는 말문을 닫곤 한다. 무분별하고 너무 노골적인 복선을 깔고 흉기처럼 던지는 그들의 말에 상처받기 싫어서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어떤 이가, 자기 말만을 고집하면서 이런저런 복선을 깔았다. 그러나 그건 복선이라기보다는 천박한 ‘미끼’였다. 그 유치함에 멀미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밤길을 홀로 걸어 돌아왔다. 혼술을 하면서, 혼자 영화도 보고, 잠들기 전에 최근 읽고 있는 책을, 나만 있는 방에서 읽다가 잠들었다. 그리곤 여전히 또 낯선 새벽에 깼다. 잠 못 이루고 겨우 잠들었다가 또 깼다. 아직 창밖은 어두운데... 견디다 못해 수면유도제를 한 알을 삼키고 잠들길 청해 보지만, 그래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그때 그 일(삶의 복선)이 있었던 이유가, 오늘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 거야? 하는 뒤늦음 깨달음이 있을 수도 있을 거다. 그 순간,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혹은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라는 탄식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벌써 이해의 절반이 지났다. 이 말의 복선(?)은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말이다. 이미 지난 것에 대해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남은 것에 희망을 걸어 볼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드려다 보면 모든 것엔 복선이 있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