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영철 Francis Jun 30. 2022

미술의 가출

MA, CA를 이해하는 건, 또 하나의 도전이다


피카소 그림은 따라 그리기 복잡하고 애매하지만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다. ‘그 까이꺼’ 대충 큰 붓에다 물감을 잔뜩 묻혀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칠하면 이보다야 못 하겠는가. 제목도 귀찮으니 그냥 <無題>. -평소 이런 작품명을 볼 때마다 나는 작가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도 무책임 한번 해 볼까.


이 그림을 그린 웰렘 드 쿠닝(1904~1997)은 추상표현주의 양식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화가다. 그가 이런 말은 남겼다. “때때로 회화를 파괴하는 화가가 있어야 한다. 세잔이 이 일을 했다. 피카소가 입체주의로 이 일을 했다. 마지막으로 폴록이 이 일을 했다. 그들은 그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철저히 쓸모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다시 새로운 그림들이 생길 수 있었다.”라고.


그럼 그렇지... 그림도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할 능력은, 내겐 전혀 없다. 요즘 좌충우돌 미술사 공부를 하다가 이런 에피소드들 앞에서 혼자 잘 놀고 있다. 그러다 문득 끊으려해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교와 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 저책에서 읽고,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아마추어도 생 아마추어의 미술 이야기니 그냥 가볍게 읽고, 제발 따지지 말기 바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궁색’ 밖에 없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자 많은 대중이 모여 미사를 드릴 공공장소가 필요했다. 그때 등장한 집회소를 ‘바실리카’라고 불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곳에 어떠한 조상(彫像)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조상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달랐다. 특히 6세기 말, -당시 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西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東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로마 교회(천주교)의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많은 신자들이 문맹이었기에 이렇게 말함으로 회화를 옹호했다.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대신해 줄 수 있다. 그림이 곧 책이다.” 성화가 성경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회화는 교황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조건이 있었다. 거룩한 이야기를 담을 그림은 명확해야 하지만, 또한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스럽지 않은 것에 시선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 이외 다른 인물과 사물은 대충 그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동로마 교회(동방 정교회)는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미술은 어떤 경우라도 절대 금지했다. 그러나 결국 세월이 좀 흐른 뒤 동로마 교회도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말처럼 회화 등을 받아 드리고 만다. 그것을 우리는 ‘이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미술은 교회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런 유래의 연장선은 아니지만, 아래 그림 두 장은 비교해 본다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작품은 1300년 초에 그려진 것이다. 같은 상황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자캐오-을 그렸지만 시기가 3~4년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풍은 확연히 다르다. 첫 그림은 두초(Duccio)가 그린 것이고 그다음 작품은 조토(Giotto)가 그린 거다.


두초의 그림에 등장하는 수십 명이 되는 군중의 얼굴 윤곽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붓놀림이 자유롭고 뚜렷하다. 원근법과 명암을 나름대로 잘 처리했다. 게다가 나귀도 두 마리나 챙겼다. 마치 화가가 그 장면을 직접 보기라도 한 듯이 그렸다. 루카복음 19장을 한 장에 담은 것이다.


반면 조토의 그림은 두초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성의(?)가 없어 보인다. 군중의 수도 두초의 그림에 비하면 택도 없고 (나귀도 한 마리)... 어쨌든 나 같은 아마추어에겐 두초의 그림이 더 리얼하게 읽힌다. 하지만 미술사 측면에서 본다면 두초와 조토의 사이엔 비교도 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조토는 13~14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신곡>의 단테도 그를 극찬했을 정도다.


조토는 시쳇말로 ‘시방 무엇이 중현디?’라는 물음에 답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각설하고 수 백 년을 뛰어넘어 보자. 현대미술은 어떤 모습일까? 한 때 구상미술이라는 것이 대세였다. 숲에서 점심을 먹는 그런 풍경을 그린 것 등등... 하지만 추상미술이 등장한다. 구상미술처럼 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에서 점점 벗어난다. 사진의 등장도 무시 못 한 것 같다. 아무리 화가의 묘사 실력이 뛰어나도 사진 찍은 것보다 잘 그릴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추상은 단순한 도형, 색의 몇 가지 조합, 운동성, 빛 등과 같이 전에는 하위 구성요소였던 것들을 탐구 주제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피카소나 폴록의 작품들이 어려운 이유다. 그래도 이들은 양반에 속한다.


만일 어떤 이가  ①철물점 같은 곳에서 파는(Ready-made) 남성용 소변기 사서 대충 사인한 후 출품한다면, 혹은 ②120여 개의 내화벽돌을 전시장에 쌓아놓거나, ③바닷가에 돌과 흙 등을 불도저로 밀어 넣어 방파제를 만들어 놓은 게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또 ④국회의사당 같은 데를 천으로 둘러쌓아 놓고 예술 운운하는 작가들이 있다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이 기이한 일이 Moden Art(MA/현대 미술)를 넘어 Contemporary Art (CA/동시대 미술)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참고>

* 상기 작품의 작가들

① 1917년 마르셀 뒤샹 ② 1968년 칼 안드레아 ③ 1970년 로버트 스미드슨 ④ 1994년 크리스토

* CA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CA 미술 시대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60년 대 뉴욕의 한 전시장에서 2대의 피아노를 부수고, 관객들의 넥타이와 셔츠를 즉흥적으로 잘라버리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이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백남준이다. 그 당시 그의 그런 파격적인 행위에 대해 조현병 환자로 취급한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아무도 그의 정신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그는 뒤샹의 뒤를 잇는 세계적인 전위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다. 그린 것이 아니고 그냥 철물점에서 사 온 진짜 변기다. 그래도 화장실이 아닌 전시장에 전시(?)되었기에 미술작품이라고 예술가들은 말한다.>


팔레트 위에서 사용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물감이 아니다. 물감 대신 빛이 등장하는 등 미술이 캔버스에서 가출을 한 지 오래다. 그들은 이것을 '미술의 진화'라고 한다. 그 진화가 깊어질수로 내가 느끼는 MA, CA에 대한 절망은 깊다. 비록 요즘 같은 폭염일지라도... 그것들을 드려다 보고 있으면 나도 가출하고 싶다. ㅠㅠㅠ


이런 내게, 며칠 전 어떤 이가 짤막한 글을 하나 보내왔다. “지금의 미술을 이해하는 건, 하나의 도전임은 분명합니다.” 이 카톡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그래! 이 도전에서 이겨 내고 싶다. 그래도 안되면 그때 가출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길 위에 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