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시내에 있는 <애비로드>라는 거리에 랜드마크가 된 횡단보도가 하나 있다. 일명 비틀즈 크로스라고도 불리는 데, 1969년 발매된 록 밴드 비틀즈 자켓 12집 앨범 표지 사진에 실려 유명해진 곳이다.
흰색 횡단보도 위, 좌에서 우로 존 레논이 앞장서고 그 뒤로 비틀즈 멤버들이 따라 건너는 사진. 흥미로운 장면은 일행 중 3번째로 걷고 있던 폴 매카트니가 눈을 감고 있었고 왼손잡이인 그가 오른손에 담배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멤버들과 발도 맞추지 않으면서...
그래서 갖은 억측이(폴의 사망설) 난무하기도 해서 더 유명해진 곳. 그 이후로 그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 횡단보도에서 비틀즈처럼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비틀즈라는 멤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진, 아니면 그것을 패러디한 사진은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 패러디 사진의 종류는, 남녀노소-유명 만화 캐릭터-심지어 수사복 차림의 수사들 등 이루 다 세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다.
꼭 그 횡단보도가 아니더라도 그런 장면은 경주 보문 길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일행 서넛이 길을 걷다가 차 없는 횡단보도를 만나면 그중 누군가가 비틀즈처럼 따라 해 보고 사진을 찍는 장면. 그러다 보니 나처럼 애비로드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언젠가 그곳에 가 본 경험이 있는 듯 착각에 빠지곤 한다.
게다가 아주 오래전에 그 사진을 맨 처음 본 날, 윤동주의 <길>이라는 시가 떠 오른 이유는 내가 너무 센치멘탈 한 때문일까.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갑니다...>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실체도 모르고 어쨌든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어 가며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설사 길을 떠나 그 실체를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답답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면, 일단 길로 나서고 볼 일이다.
길 2 - 토론토
30대 중반 비즈니스 때문에 캐나다 토론토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며칠에 걸쳐 업무를 끝내고 마지막 날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인상 깊은 노상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낯선 도시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때 필요한 것은 ‘포도주와 음악과 친구’였다. 하지만 포도주는 그 카페 메뉴에 없었고 야외 기둥에 매달린 작은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은 바람소리에 묻혔다. 친구는 없었고 나는 아주 멀리 떠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외롭거나 힘들거나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도리어 떠나 온 길 위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검은 커튼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방인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천루 아래 긴 차도는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길과 함께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그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중 어떤 생각을 당시 읽던 책 뒤에, 두서없이 휘갈겨 쓴 것을, 얼마 전 서재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다.
... 소중한 것, 그것이 물건이든 추억이든 사람이든 잃어본 사람은 그 답답한 마음을, 어쩔 수 없음을, 그 절망을 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툭 털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정말 생각뿐이다. 집착이 허상이 되고 미련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결국은 일어 서지 못하고 만다....
무슨 감정에 겨워 그 글을 썼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길 떠남을 했기 때문에 사색하고 쓸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낯선 길 위에 홀로 선다는 것이 두려운 나이가 되었다. 뭔가를 하기엔 늦은 때(나이)는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래도 나는 요즘 나이 든 것을 받아 드릴 준비를 하고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간혹 살면서 말 닫고 있어야 할 때, 나는 그 노상카페 기억을 가슴에서 꺼내 볼 때가 잦다. 잊지 못할 엄청난 어떤 일도 없었다. 굉장히 멋진 장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소중한 추억의 흔적이다.
길 3 - 명동
지난 토요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 교우 자녀 혼례 미사 때문에 갈 일이 있었다. 행사 시작까지 틈이 있어 홀로 성당을 뒤로하고 섰다. 내리는 잔비를 피하지 않고 눈 감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시켰는지 모르겠다.
성당 맞은편 YWCA와 좌측의 로얄호텔, 유네스코 회관, 제화점들, 금융기관들, 각종 유명 식당들... 지하철 명동 역까지 차 없는 5백여 미터의 그 길을 걷으며 회한에 빠졌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장소와는 재회의 기쁨을, 사라지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나누면서.
그 거리를 다시 걸어 본 게 30여 년이 넘은 것 같다. 몇 년 전에도 명동성당 새벽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미사만 드리고 일정대로 움직이다 보니 가보지 못했던 길이다. 다시 찾은 그 길 위로 바람과 비는 아쉬운 여름날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듯 요란을 떨었다.
각종 가벼운 먹거리와 액세서리와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도로를 점령했고 폭발적으로 오고 가는 국적 모를 외국인들로, 그 명동은 그 옛날 내가 알던 그 명동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였다.
이런 게, 시대적인 대세라는 걸까. 명동이 이렇게 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하지만 외국 팝송만 듣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지금은 K-팝이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 그 꿈도 못 꾸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명동성당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다 길 가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았다. 더 이상 30대의 아닌 사내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적당히 나이 든 그렇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아 좋았다. 살쪄 보이지도, 비굴해 보이지도, 거만해 보이지 않았다. 그만하면 됐다.
경주로 돌아오는 어두운 -신부 측에서 준비한- 전세버스 안에서 마시다 만 캔 맥주로 목을 축이고 살면서 만난 길들과 조우했다. 그 길들, 애비로드에서 비틀즈를, 토론토에서 이방인을, 명동에서 적당히 나이든 사내를...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건배하고 속삭이듯 건배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