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오렌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by 오롯이

현재의 나는 흔히들 알고 있는 투잡, 겹벌이다.

퇴근 후 대형 베이커리 카페에서 마감파트 알바로 일하고 있는데

10월 5일이 되면 일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사계절을 겪고 나니 뭔가 알 것 같다.


지난주 나는 인상적인 손님들을 만났다.

"어서 오세요. 손님, 메뉴 정해지시면 벨 눌러주세요~"라고 말했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다.

혼자 마감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 나는 손님의 표정을 살피면서 하던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중년의 아주머니와 커플인데 아주머니는 자리를 잡으시고 앉으셨고 커플이 주문을 한다.

여자분은 외운듯한 주문을 또박또박 말한다.

"아샷추에 커피 한 샷만 넣어주시고, 블루베리스무디, 뜨거운 아메리카노 부탁합니다.

아샷추에는 꼭 한 샷만 주셔야 해요. 꼭!"

이렇게 확인까지 받은 뒤 결제까지 마치신 여자분.

자리로 가야 하는데 잠시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숨을 고르신다.

그것을 지켜본 남자분이 어깨를 토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난 확신 했다.

'어뜩해~남자친구 어머니 만나는 첫자리인가 봐'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 그래서 내 인사에도 반응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럴 것이 아주머니, 어머님은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에 뾰족구두, 한껏 볼륨을 살린 머리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나오셨다. 반면 여자분은 단아함 그 자체였다. 굵게 말아 푼 웨이브 머리, 단정한 원피스,

살색 스타킹, 남자분 보다 키가 크면 안 되니 단화로 마무리하셨다.

남자분은 평범한 모습이지만 두 여자분의 얼굴과 기분을 살피느라 염념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남자분이 눈치는 있어 보여 다행이다.

으~얼마 떨릴까...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심경이다.

음료를 만들면서 나는 나와 우리 시어머님의 첫 만남이 떠올렸다.


정확한 년도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계절은 기억이 난다. 봄에 리본 달린 흰 니트티와 미디치마를 입었었다.

덥지 않았지만 긴장과 당황이 섞여 덥게 느껴졌던 것 같다.

우리 커플은 장거리 연애라 자주 못 봤다. 그때 내 소원이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렇게 애틋할 수밖에 없는 우리였는데 한 번은 그가 데이트 도중에 말했다.

"엄마가 이 근처 병원에 입원 중이신 데 가 볼래?"

"어디가 아프신데, 많이 아프셔?"

"다리를 조금 다치셨는데 많이 아프신 건 아니야, 가볼래?"

"쉬시는데 내가 가면 불편하지 않으실까?"

"괜찮을 것 같은데, 가보자"

그렇게 나는 인근 마트에서 뭔가를 샀는데 뚜벅이라 무거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병실에 들어서고 처음 마주한 어머니... 환자복을 입으셨지만 깨끗한 피부에 단정하신 머리모양까지

그와 닮지 않아 조금 놀랐었다.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경현아, 손님이 오셨는데 뭐라도 대접해야지" 하시며 냉장고를 가리키신다.

그는 주섬주섬 봉지에서 오렌지를 꺼냈다.

아.... 그때 그 문제의 오렌지. 오!!! 렌!!! 지!!!!!!!!!!!!!!!!!!!!!!!

사실 나는 20대가 넘어서 오렌지를 까보지 못했다. 아니 기회가 없었다.

집에서는 엄마가 까주셨고, 유치원에서는 주방선생님이 까주셨고, 자취하면서는 굳이 사 먹을 일이 없었다.

그래도 여자인 내가 까겠다고, 어머니께 잘 보이고 싶어서 서슴없이 오렌지와 칼을 잡았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다. 심지어 비닐장갑도 없어서 손을 씻고 껍질을 벗기려 했지만

오렌지 과육에 붙은 하얀 귤락 같은 것이 너무 두꺼워 손이 많이 갔다.

그때부터 과육이 흐르고.... 내 땀방울도 흘렀다. 깔끔하게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했어야 했는데,

아니하고 싶은데 오렌지를 조물조물 거리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 망했다. 어떡하지....'

어머님과 그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있는 그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다시 어머님과 인사하던 그때로 돌리고 싶었다.

하필 왜 오렌지를 꺼낸 건지... 그가 조금은 미워, 그 탓으로 돌린다.

그다음부터는 전혀 기억이 없다.

'나 찍혔겠지?? 오렌지 하나 못 까는 온실 속 화초라 생각하시면 어쩌지?? ' 하는 생각만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너무너무 창피한 순간이다.

지금은 뭐~~ 오렌지 없어서 못 먹는다. 하하하하

그런 첫 대면을 떠올리자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 책에서 봤다.

'NG! 이렇게 외친 다음.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이게 우리 인생에서도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나의 20대, 사랑에 빠진 나는 그의 어머니 앞에서 오렌지를 잘 까고 싶었을 뿐...

지금은 내가 담근 열무김치를 맛있게 드셨노라 문자까지 보내 주실 만큼 나도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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