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통닭

엄마가 김밥을 많이 쌌던 이유가 슬프다.

by 오롯이

추석연휴 시작되었고 내일이 추석이지만 나는 너무 여유롭다.

늦잠도 잘 만큼 자고 배가 고프면 각자가 챙겨 먹고 같이 먹을 것을 권하는 그런 구조가 된 것이 한참이다.

명절증후군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없는 것... 아니 덜한 것 같다.

외며느리 경력 18년이라 그런가 이제는 배짱도 생겨 웬만한 건 넉살모드로 넘기는 능력도 생겼다.

아직까지도 시아버님은 나를 '새아가'라고 부르시지만 나는 그 말이 쑥스러운 '헌 아가'이다.

하하하

나는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보던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세상 편한 자세로 TV를 본다.

얼핏 봤지만 계속 김밥만 나온다.

저게 뭐야? 요리 프로도 아닌 것이 먹방도 아닌 것이...


"여보, 저게 뭐예요?"

"어어~김밥의 천국이란 다큐야. 같이 볼래? 이리 와"

"김밥천국?"

"아니 김밥의 천국이래"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에니매이션 속, K-푸드의 아이콘이 된 김밥의 기원과 근현대사를 다룬 다큐프로란다.

나도 다큐를 좋아하는 편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엄마가 떠올랐다.

지난번 여름 친정에 가서 고추를 땄었다. 더운 날씨에 일한 것도 힘든데 매 끼니 밥까지 해 먹는

일은 정말 죽기만큼 싫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잘 알기에 부모님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미리 준비해

가거나 간단히 해 먹거나 사 먹었다.


<안동사투리 버전>

숙이- "아부지요, 점심때 드시고 싶은 거 있는껴? 말씀하소. 주문받니더!"

엄마- "뭘 주문해~됐어. 고마 치워. 고추 따고 힘드데 그냥 있는 거 먹고 치워."

숙이- "나는 하루밖에 안 따는데 뭐가 힘드니껴.

아부지, 엄마는 맨날 따는데... 잡수고 싶은 거 있음 빨리 말하소.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어주게"

엄마- "으그~됐다까이"

아빠- "숙아, 그면 김밥이나 먹으까?!"

엄마- "학교서 아들한테 시달리고 살림하느라 힘든 딸내미한테 뭘 시키니껴. 그냥 있는 거 먹시더."

숙이- "아~엄마 고마해라. 나는 괜찮다~김밥!!! 알았니더."


언젠가 내가 그랬었다.

가까이 있음 자주 찾아뵙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은 말로 표현해주면 제일 좋다고,

그래야 아빠 엄마도 불편함이 없으실 테니 뭐든 표현해 달라고, 그 후부터 아빠는 감정표현을 조금씩 하기

시작하셨다. 처음 입을 떼실 때 민망하실까 봐


"아부지요,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너무너무 좋니더.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사면되니까!

말해줘서 고맙니데이~"


그 이후부터 아주 자연스럽다.

아빠가 주문하신 김밥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갔다. 엄마는 딸이 힘들다는 생각뿐

다양한 토핑의 김밥과 초밥을 사자며 타협점을 찾으신다. 대신 나는 계란국을 끓이겠다고 해 극적인

합의가 성사되었다.

집에 오니 아빠는 한숨 주무신 후 한결 개운하게 우리를 맞이하신다.

내가 만든 열무김치도 상에 올리고 맛있게 드시는 아빠와 엄마를 보는데 내 배가 부른 느낌이다.

조촐한 밥상이지만 평화로운 점심시간이 가슴 먹먹하게 행복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김밥 싸던 우리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안동, 서선국민학교 25회 졸업생인 숙이

숙이- "엄마, 우리 소풍 갈 때랑 운동회 때 김밥 한 번 싸면 진짜 많이 쌌었잖아. 맞지?"

엄마- "그때 쌀 때 50줄 쌌었어."

숙이- "뭐?!!?!! 50줄?"

아빠- "그렇게 쌌을걸"

엄마- "야야~~ 입이 몇 개인데

집에 할매랑 할배 드실 거 챙기고, 아빠 일 가실 때 아저씨들하고 나눠드시라고 줘야지

작은 집 줘야지, 큰 집도 줘야지. 니들 가서 먹을 거 싸고 저녁에도 참으로 먹지.

50줄 싸야 딱 맞아."

숙이- "와~엄마 손 진짜 크다."

엄마- "그때 뭐가 있나. 다른 집은 운동회라고 풍산, 꼬꼬통닭집 가서 통닭도 사 오는데 엄마는 여유가 안돼서

그 닭 한 마리 못 튀겨갔잖아. 엄마가 그때 얼마나 부끄럽고 미안했는지 모른다.

네들도(삼 남매) 친구들 먹는 거 보고 얼마나 먹고 싶었겠노.

대신 김밥이라도 실컷 먹게 해야지. 그래서 많이 쌌다."

숙이- "........... 나는 통닭 하나도 안 먹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랬었나"

엄마- "그래, 미안했지."

숙이- "대신 큰 엄마가 햇 밤, 햇 땅콩도 삶아주고 그랬잖아. 그거면 됐지."

엄마- "그랬나? 그럼 됐다."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안동 갈 때마다 우리 배는 맛있는 엄마 밥으로 이미 포화상태인데 왜 꼬꼬통닭집 통닭을 사 주셨었는지...

배가 부르다고 극구 말려도 왜 손수 직접 전화주문을 하셨는지...

배달이 안돼서 굳이 아빠가 찾으러 가야 하는 수고러움을 마다하고 사주셨는지...

아기 낳고 손주를 보러 오실 때마다 반조리 찜닭을 포장해 오셨는지...

그때 운동회, 소풍날 통닭을 사 먹이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한이 되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꼬꼬통닭

김밥을 먹는 내내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내가 만들어 간 열무김치가 맛있다는 말씀뿐이시다.

그때 눈물을 참느라 너무 애을 썼던가... 글을 쓰는 지금 그 눈물로 모니터가 일렁일렁 춤을 추다 넘친다.

나는 그 통닭보다 새벽녘 일찍 일어나 농사 지은 쌀로 밥을 짓고, 농사지은 참기름을 한껏 넣은

고소한 김밥이 더 값지고 귀하다.

그 정성 어린 대접을 받았기에 나도 우리 딸들이 소풍 갈 때 꼭 김밥을 싸 줄 수 있었나 보다.


이번 추석에도 엄마는 꼬꼬통닭을 사주실까?

사주신 다면 세상 신난 어린아이 표정으로 반길 것이고

그 어느 치킨 광고 모델보다도 더 맛있게 먹을 것이다.


2025년 여름을 기점으로

통닭은 나에게 그냥 통닭이 아니게 되었다.


<첨언>

1년 한 번, 가을운동회에서 산 천 원짜리

플라스틱 미미인형을 1년 내내 갖고 놀았던 숙이...양말을 자르고 꿰메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던 숙이는 가을운동회가 늘 기다려졌었었다.

새 인형을 살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일 가시며 아빠가 주신 천 원을 꼭 쥐고

똑같은 얼굴에 다른건 알록달록 형광색 옷뿐인 미미인형을 고르며 설레던 숙이가 지금도 선하다.


또 우리 삼남매는 달리기를 너무너무 잘했다.

엄마는 몹시 기뻐하셨고 상품으로 받은 공책을 아빠에게 보여드리며 자랑하기 바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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