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을 때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사실 여덟시에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이제는 일어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오늘은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 일 없는 사람이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는 것과 해가 져서야 일어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없어 보이는 일일까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니 곧 잠이 깨버렸다. 아쉽구나. 하고 생각하며 일어나서 앉았다. 내 옆에는 전날 십분 정도 읽다 만 소설책이 놓여있었다. 그 책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 둘까, 그만 두고 다른 것을 읽을까 고민하면서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그만 둬버린다면 앞으로 다른 책을 읽어도 쭉 결말을 알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그만둬 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책을 읽었다. 책이라도 끝까지 읽어서 다행이었다.
휴일에 집안일을 했다. 빨래를 돌렸다. 저번 주에 말린 후 거실 바닥에 던져둔 오래된 빨래더미를 개서 정리한다. 속옷, 수건, 상의, 하의, 잠옷, 원피스, 양말. 일곱 가지로 분류해서 각각의 서랍장에 넣었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집에서 먹는 것도 없는데, 주말이면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헤드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버렸다. 화장실에 뭉쳐있는 머리카락도 집어서 버린다. 들어간 김에 샤워를 했다. 변기와 이빨을 동시에 닦았다. 쓰레기를 모아서 20L 봉투에 쑤셔 넣고, 터진 옆구리는 테이프로 막았다. 냉장고에서 썩은 반찬을 가려내고, 쓰레기를 가져다가 버리면 집안일이 끝난다. 사이사이에 텔레비전을 보고, 책을 읽고, 밥을 먹었다. 모든 일을 끝내면 자야할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김지옥씨는 저희와 함께 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 김지옥, 얼굴 클로즈업. 장면 전환, 짐을 싸며 애써 웃는 모습.
그래도 많은 걸 배웠던 시간이에요. 아, 엄마 밥이 너무 먹고 싶네요. 헤헤.
장면 전환,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뒷모습. 자막.
최고 엔터테이먼트는 앞으로도 계속 그녀의 앞길을 응원합니다. 운운.
최고 시청률을 달성한 장면이라 그런지 텔레비전을 몇 번 돌리면 매번 그 프로그램이었다. 엔터테이먼트에서 제작, 방영하던 인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참가자가 떨어진 후로 보지 않았다. 처음 프로그램 기획이 떴을 때 드럽게 욕했는데. 결국은 보고 투표까지 했다. 매번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김지옥이 눈물을 흘리면 그때는 투표를 했다. 반대로 사람들은 김지옥이 울 때마다 욕했다. 지만 힘든가? 그래서 김지옥은 뒤로 갈수록 울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탈락한 김지옥은 울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김지옥을 위로했다. 그래도 좀 불쌍하긴 하네.
그녀를 처음 본 그날의 주요 내용이 사내공모전 참가독려였다. 생각보다 참가율이 저조하자 위에서부터 사원들은 공모전에 참가해달라는 독려가 내려왔다. 사진, 에세이, 동영상 중 하나를 고르면 됐다. 필참은 인턴이나 계약직 근무자들이었다. 제출 기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나는 핸드폰 갤러리를 뒤쳐 보기 그럴 듯한 사진을 하나 제출했다. 아무리 봐도 주제와 동떨어진 사진이라 뽑힐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걸 노리고 고른 사진이었다. 사진전의 주제는 아름다운 우리 회사였다. 대상은 사무실 각자 자리에서 앉거나 일어서거나 한 채로 렌즈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각각 회사의 풍경이나, 회사원 사진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매미의 허물이 나의 사진이었다. 최황규씨가 대상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상대적으로 내 상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나오지 않았다. 최황규씨 작품, 그리고 그 작품에 찍힌 자신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었고, 그러다 짧게 아 그러고 보니 지옥씨도 상을 받았죠. 축하해요. 정도의 이야기였다. 내가 받은 상은 장려상이었다. 부상으로 회사로고가 찍힌 16기가 유에스비도 받았다. 장려상은 스무 명, 참가상은 스물다섯 명. 그러니까, 그냥 참가상을 받은 게 아닐까. 차라리 참가상이 더 나았다. 참가상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지만, 장려상부터는 한 달간 출근길에 전시되었다.
하반기 인턴은 스무 명 정도 뽑혔다. 부서마다 많으면 세 명을 뽑았다. 우리 부서는 두 명이었다. 나는 인턴 경력 때문에 뽑혔다. 내 옆 자리의 최황규씨는 학벌로 뽑힌 모양이었다. 마지막 날 이후로 이들 모두 퇴사하고, 단 한명만 남아서 계속 일을 하게 된다.
출근 후 텀블러를 들고 화장실로 가는 것이 매일 첫 번째 일이다. 내가 일하는 전략기획부는 화장실과 거리가 조금 있어서 좋았다. 가는 길에 다른 부서 세 개를 지나쳐야해서 그 점은 별로였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앞에 그녀가 마주 걸어왔다. 품에 파일을 안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조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쳤다. 멈춰서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그녀는 전략기획부로 들어갔다. 나는 뒤돌아 우리 부서로 빠르게 걸었다. 그녀가 문 앞에 서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직원들이 거의 없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가 뒤 돌았다.
아, 최철호 부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오늘 오전은 외근 나가셨어요.
이것 좀 전해주실 수 있나요?
네. 누구라고 할까요?
인사부에서 전해드렸다고 하면 아실 거에요.
인사부요.
인턴 분이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어려 보이셔서요. 그리고 제일 일찍 나오신 걸 보니까. 그런 것 같았어요.
눈이 일찍 떠져서요. 아! 저는 김지옥입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다행히 내 손을 잡았다.
저는 이민정이에요.
네. 그럼 이 파일은 나중에 부장님 오시면 전해드릴게요.
부탁드려요.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서 사라졌다. 나는 포스트잇에 이민정, 인사부라고 적은 후 키보드 밑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밖을 살핀 후 다시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다. 볼일을 보고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후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이민정은 흔한 이름이라 찾는데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한참 핸드폰을 하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모두 자리에 앉아있었다. 과자를 하나 까먹고,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정리해 모니터에 붙였다. 옆자리 최황규씨도 오전에는 부장과 외근을 다녀온다고 했다. 대충 키보드를 두드리다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했다.
생각해보니, 안쪽 계단을 올라가면 그 앞에 바로 인사부가 있었다. 도시락이 다이어트 도시락이라면, 운동을 위해 삼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그럴 듯했다. 지금까지 그런 루트로 출퇴근 한 모양이었다. 내가 멍청한 시도를 하기 전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점심시간에는 혼자 이십분이나 걸어 나가 돼지국밥을 먹었다. 나는 소음인이라 돼지를 먹으면 머리가 아프다. 소음인은 고기 중에 닭이 가장 잘 맞다. 그리고 소화기간이 약하다. 심약하고 조용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나는 체했다. 가게 주인에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화제를 사먹었다. 조용해서 들어갔는데, 충격적인 수준으로 맛이 없었다. 급하게 회사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군가 이빨 닦는 소리를 들으며 설사를 했다. 아마 서로에게 곤욕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속을 비운 후 변기에 앉아 다시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저녁에나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찾았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프로필사진으로 해두었고, 정직하게 이름도 적어두었다. 인스타그램을 조금 구경하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이민정을 찾았다. 몇 사람 뜨지 않았다. 내가 찾는 이민정은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은 22개였다. 최근에 올린 사진은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셀카 한 장이었다. 실물보다 못했다. 그런 것으로 따져보았을 때 SNS를 열심히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직원이었다. 셀카 배경에 ‘정 대리’라고 적혀있었다. 사내 네트워크로 들어가 인사부 이민정 대리를 찾았다.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지우지 않은 그 전 사진들을 모두 확인하며 점심시간을 보냈다.